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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5 2월 초 9일. 영춘 궁동 등지에 地皮가 있다고 한다. 지피란 창칼로 끊을 수 없고 화포로 도 뚫을 수 없는 돌인데 이것으로 갑옷과 투구를 만들면 능히 왜적과 양적을 섬멸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대장이 종사를 시켜 구해 보라고 하는데 사람의 마음이란 알 수 없 다. 오늘과 같이 큰 변을 당하여 개인을 위해 남의 보리밭을 밟고 사람이 사는 집을 들쳐 가면서 지피가 있는가 없는가를 탐지하고 땅을 판다면 비록 몇 푼의 돈을 받는다고 하나 집 주인들이 원망할 것이 분명하다. 그래서 의병대장(류인석)이 나로 하여금 사객 종사 안 신모와 함께 영춘에 가서 地皮의 유무를 탐지하여 오라는 것이었다. 영춘으로 가는 길에 단양의 우리 집을 지나가기 때문에 집에 들러 유숙하였다. 2월 10일. 아들 張益煥과 安愼謨를 시켜 永春에 가서 그곳에 지피가 있는지 없는지 알아 보게 하였다. 2월 11일. 너무 달린 나머지 피곤하여 집에서 드러누워 앓았다. 2월 12일. 역시 집에서 치료하였다. 단양 수성장의 참모 李晉夏가 守城하는 일로 장차 대진에 다녀오고자 하는데 길이 어긋나 내게 길을 알려 달라고 하였다. 그래서 내가 서신 을 띄워 대장 참모 이필근에게 주니 대장소에 올렸다. 2월 13일. 아들 익환이 영춘에서 돌아왔다. 地皮에 관한 이야기를 하는데 서울에서 들려 온 소식에 의하면 일찍이 병인년(1866 병인양요가 일어난 해)에 파가지고 간 뒤인지라 남 은 것이 몇 조각 없다고 하며 큰 것이 겨우 손바닥만 하고 돌과 비슷하였으나 돌이 아닌 그런 물건이라 한다. 단양 수성장 심희경이 내방하였다. 2월 14일. 본읍의 관리 李允煥이 내방하고 돌아갔다. 2월 15일. 제천에 당도하여 류인석 의병장을 만나 뵙고 지피에 관해 자세히 설명하였다. 선봉장 金百先이 누차 가흥을 공격하여 왜군과 접전하였으나 조금도 공을 세우지 못하고 아군 10여 명만 부상을 당하였다. 뿐만 아니라 將令(군령)까지 어겼으니 그 죄를 용서할 수 없어 즉일로 형을 집행하여 시신을 지평 본가로 보내고 후히 장사지내게 했다. 2월 16일. 왜와 내통하여 함께 모의한 평창군수 嚴文煥을 잡아 효수하여 警衆하였다. 근 자에 가장 상쾌한 일이었다. 이후로 많은 선비들이 구름같이 모여들었으나 장수 재목을 얻 지 못하여 가흥과 수안보 등 두 곳에 있는 왜적을 오래도록 소탕하지 못하였다. 그래서 수 로와 육로의 소금 길이 막혀서 민심이 흉흉하여 이에 관심을 가져야 했다. 대장에게 누차 왜적을 섬멸할 계책을 건의하였으나 우리 의병들의 무기가 저들보다 못하여 대적하기 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