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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4 정월 23일. 군오를 다시 정비하여 淸風, 西倉洞에 이르렀다. 서창동에 좋지 않는 사람이 많아 범인을 잡아 효수하고 대중에게 경계하고 청풍읍에 이르렀다. 정월 24일. 경기도 여주 의병장 沈相凞가 북창에 유진하고 있다가 우리 대진이 청풍에 왔다는 소식을 듣고 인사하고 돌아갔다. 군사들을 호군하여 安承禹를 중군장으로 삼고 李 貞器를 대신케 하였다. 정월 25일. 제천으로 군을 옮겼다. 심상희와 합진하기 위해서였다. 정월 26일. 심상희의 의진은 원주 등지로 귀환하였고 우리 대진은 아직 제천읍에 머물렀 다. 그러나 읍민은 모두 왜적이 읍을 방화할까 두려워 밖의 동네(외촌)로 피난하여 가위 읍내가 무인지경이 되었다. 이에 방을 붙여 읍으로 돌아오라고 권했던 바 주민들이 하나 둘 돌아오기 시작했다. 그래서 제천에 오래 유진하기로 계획하였다. 2월 초 2일. 군을 나누어 각처 요로에 주둔시켜 왜군을 섬멸할 계책을 세웠다. 禹翌鼎을 좌익장으로 삼아 박달재 꼭대기에 나아가 진을 치게 하고 安成海를 우군장으로 하여 院西 에 출진시켰다. 후군장 申芝秀로 하여금 內倉里에 출진시키고 전군장 洪大錫을 청풍 서창 에 출진시키고 李康年을 유격장으로 삼아 충주 東倉에 출진시켰다. 李弼凞를 鎭東將으로 삼아 원주 등지로 출진시켰다. 그리고 의리로서 士民을 효유하고 大事를 함께 할 계책을 세웠다. 한편 종사 李建永과 沈履燮을 서울[京師]에 보내 주상(임금)께서 移御하였다는 사 실과 난적 흉적의 계략이 무엇인지를 상세히 정탐케 하였다. 그 후 충주 司興에 주둔한 왜적이 자주 목계진을 건너 침범할 뜻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선봉장 金百先이 의군 10초를 인솔하고 어둠을 타고 荷沼津을 건너가서 鵲尾山에 복병을 두게 하였다. 또 후군장 申芝秀로 하여금 군사 10초를 이끌고 목계진을 건너 먼저 전투를 벌이게 하였다. 소모장 李範直은 군사 10초를 이끌고 몰래 福灘江을 건너 鳳凰川에 매복 하였다. 후군장이 먼저 극비리에 가흥의 적진에 들어가서 불을 지르면 이것을 신호로 하여 각처의 복병이 일제히 협공하여 가흥의 왜군을 일거에 섬멸하려고 계획하였던 것이다. 모 든 부대가 각기 명을 받아 현지로 떠났다. 후군이 도강하여 전진하여 가흥 마을의 오두막 에 불을 질러 동시에 일제 사격을 가하였다. 소모진도 봉황천에서 발포하니 왜군은 불의의 공격에 놀라 창황히 튀어나와 한참 발포하였다. 그러나 이때 김백선이 이끄는 鵲尾山의 복병들이 응사하지 않아 아군이 불리하여 마침내 징을 치면서 후퇴하였다. 이리하여 과반 이 강을 건너 후퇴하였다. 그러나 우리 군사들이 부상하지 않는 것이 다행이었다. 싸움이 끝난 뒤 들으니 적장의 이름이 三卓이라 하였고 말을 타고 출전하였다가 아군의 총탄에 맞아 죽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