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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2 었는데 일일이 매거할 수 없다. 나는 대장의 참모 겸 司客의 임무를 맡았다. 즉시 우리 의군은 北倉津을 건너 延安驛에 이르렀는데 포군과 민병을 모두 합해서 수천 명에 달해 승승장구하였다. 관찰사 金奎軾은 참서관 경무관배와 더불어 성중에 모여 순검 순포 그리고 약간의 왜추들과 같이 굳게 성문을 닫고 있었고 먼저 발포하여 我軍의 진격 을 견제하였다. 중군장 이춘영과 선봉 김백선이 선두에 서서 군을 지휘하니 적이 감당하지 못하고 성중에 불을 지르고 성문을 열고 도주하였다. 이에 아군이 일제히 성안으로 들어가 서 북문누상에 주둔하고 일변 의병들로 하여금 관찰사와 參署 경무관들을 잡아들이게 독 촉하였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불길을 잡아 성안의 관사와 민가의 불을 모두 끄니 날이 저 물었다. 대성전의 殿牌를 문루 깨끗한 곳에 받들어 모시고 성안을 두루 돌아보니 관리와 민간이 모두 몸을 피해 달아나고 없었다. 성중이 텅 비어 거의 무인지경이라 할 수 있다. 성안에 남은 약간의 사람들을 시켜 저녁밥을 지어 군졸들을 먹였다. 밤에는 군중에 영을 내려서 널리 敵情을 탐지케 하였더니 삭발자 4, 50명을 잡아들였다. 이 중에서 개화당의 소위 순 검 순포이란 자들은 왜적의 앞잡이여서 그 죄질을 용서할 수 없어 처단하였다. 정월 초 5일. 군민이 크게 모임을 갖고 어제 체포한 삭발자들의 죄를 물었다. 그러나 의 병대장이 관대하여 하나도 형을 가하지 않고 석방하였다. 정월 초 6일. 다시 충주 관청에 진을 치고 관리와 백성들을 불러모아 술을 사고 소를 잡 아서 사졸들을 먹였다. 충주에서 의병을 일으켜 서북쪽으로 갈 계책을 세운 것이다. 정월 초 7일. 청풍에 사는 吳明春이 관찰사 金奎軾을 읍의 남쪽 마을에서 잡아 와서 옥 에 가두었더니 김규식이 간절히 청하기를 “만일 의병들이 위덕을 발휘하여 나의 목숨을 살려만 준다면 왜병을 격파할 계책을 세우겠다.”고 하였다. 그러나 金奎軾이 이 지방에서 제일 먼저 삭발을 명령한 자라 그 죄를 용서할 수 없었다. 그래서 끝내 허락하지 않았다. 정월 초 8일. 류인석 의병대장이 북문누상에 앉아 김규식을 효수하고 백성들을 경계하고 김규식을 잡아 온 오명춘에게는 상을 내렸다. 그러나 參署 警務官은 끝내 잡지 못하고 놓 치고 말았다. 그 뒤부터는 가흥과 수안보의 왜병들이 자주 와서 남산 소나무 수풀 사이로 총을 쏘아댔다. 이에 대장 류인석은 군사들에게 명하기를 깃발을 내리고 북을 치지 말라 하고 굳게 성첩을 지키라 하였고 만일 적이 접근하면 발포하라고 명하니 적은 감히 성에 근접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충주 사람들은 開化說에 현혹되어 義陳의 명령을 듣지 않는가 하면 심지어는 적편이 되어 그들과 내통하였다. 여러 번 의병을 일으키라고 명을 내렸으니 한 사람도 듣지 않아 여러 날을 충주에서 머물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