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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1 높고 그 덕행이 순수하다는 소리를 일찍이 들은 바 있다. 요번에 어머니의 상을 당하여 장 례를 치렀다고 하지만 금번 거사가 그의 제자들이 일으킨 일인데다가 이번 일이 만고 대 의에 관한 일이므로 비록 몸에 상복을 입었지만 의병의 軍情이 어떠한지 살펴보기 위해 영월을 찾은 것이다. 이에 의병 일진의 상하가 모두 류인석에게 의병대장으로 취임해 달라 고 요청하였다. 그러나 그는 굳게 대장 취임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래서 義陳의 모든 군사 들이 간곡히 청하기를 “(류인석) 공께서 상례를 치르는 것은 예로써 당연한 일이나 단지 그것은 一家의 사사로운 일일 뿐이며 오늘의 이 거사는 천하만고에 있을 수 없는 큰 사변 에 관한 일이니 어찌 한 집안의 일로 인해 만고의 의리를 저버릴 수 있습니까” 하면서 재 고해 주기를 요청하였다. 이리하여 류인석은 마지못해 의병대장에 취임하였는데 이튿날 의 병 안에 간사한 자 네 사람이 있는 것을 알고 가차 없이 처단하니 군의 위세가 엄숙해졌 으며 의병들이 모두 그의 명령에 열복하였고 호소(충청도)와 관동(강원도)의 사대부들로서 마음[人心]이 온전한 자들이 하나 둘 의병에 들어왔다. 이때 지평의 선비 安承禹가 의병을 모집하기 위해 단양을 떠나 원주 제천 평창 정선 등 네 읍으로 떠나 수백 명의 의병을 모 집하여 본진으로 돌아왔다. 그는 본시 학문이 뛰어나고 이춘영과 더불어 거사를 함께 도모 한 사람이라고 들었다. 이리하여 다시 열읍에 민병이 일어나니 군중이 모두 합해 4, 5백 명에 이르렀다. 이런 일이 있어서 義陳은 영월에서 8일간이나 머물러 있었다. 12월 26일. 제천으로 이진하였다. 제천 군수 鄭英原이 성문에 나와 대장을 맞이하였으나 그가 개화파 인물로 알려지고 있어 보지 않고 읍으로 들어갔다. 정영원이 뒤따라 들어와서 사죄하여 말하기를 “자신이 제천의 군수가 된 것은 의병을 위한 것이지 개화를 위한 것이 아니라” 하면서 누차 용서를 빌었다. 이에 대장이 드디어 그의 죄를 용서하여 주었다. 12월 27일. 제천에 유진하다. 12월 28일. 제천에 유진하였다. 이날 餞別의 날이라 소를 잡아 호군하고 고향을 생각하 는 마음을 달랬다. 병신(1896년) 정월 1일. 대장이 종사 2명, 참모 2명 각각 포군 1초씩을 주면서 무엇인가 를 분부하였다. 초 3일에 이르러 대장이 두 사람을 잡아들였다. 한 사람은 단양 군수 권숙 (權潚)이요, 다른 한 사람은 청풍군수 서상기(徐相耆)였다. 대장이 성 문루 위에 앉아 권숙 과 서상기 두 사람을 묶어 賊黨의 앞잡이가 된 죄를 물었고 이윽고 형을 집행하였다. 그 리고 충주를 공격할 전략을 의논하였다. 정월 초 4일. 의병을 이끌고 충주로 진격하였다. 중군장 李春永, 전군장 安承禹, 후군장 申芝秀, 우군장 安成海, 좌군장 元奎常, 선봉장 金百先 그리고 각 진 종사와 참모들이 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