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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9 12월 초 6일 一陣의 義兵이 제천에서 단양으로 달려 들어왔다. 내가 가서 보니 대장이 이필희요 중군장이 이춘영이요 軍師가 서상열이요 선봉장 김백선, 서기가 원용정, 참모가 이필근이었다. 군의 위세가 정제하고 호령이 또한 엄숙하였다. 중군장 李春永은 본시 砥平 上洞 사람이다. 평소 학문이 높고 그 재간이 奇偉한 선비였다. 충의심이 돈독하여 사람들 이 모두 그를 우러러보았다. 망극하기 짝이 없는 國變을 당하여 일신을 돌보지 않고 이웃 에 사는 金百先과 함께 合謨 同心하여 포군 수백 명을 모아 소모 차 원주로 달려갔더니 재빨리 原州의 守令이 도망하였고 다시 堤川으로 갔더니 제천에서도 또한 수령이 도망하 여 마침내 丹陽에 와서 단양 군수 權肅을 의리로 타일렀으나 듣지 않았다. 권숙은 수암 권상하의 후예로서 의리로 포병을 모집하라고 타일렀으나 권숙은 개화론에 빠져 우리의 말을 듣지 않았다. 마치 한탁주(韓卓胄)와 같은 자라 권숙을 잡아 가두었고 무엇보다도 급 한 일이 安民하는 일이니 정대 광명한 처사로 함께 의병에 동참케 하였다. 12월 초 7일 의진을 長林으로 옮겼다. 한편 군을 각처로 분산시켜 요소요소를 막고 엄히 방위하였고 다른 한편으로는 각면 각동에 전령을 보내어 포군을 소집하게 하였다. 12월 초 8일. 왜군 100여 명이 청풍에서 단양 장회 등지로 들어왔다고 함으로 중군 이춘 영이 80명의 포군을 인솔하고 먼저 좁고 험한 곳을 골라 伏兵을 배치하고 적을 기다렸다. 왜적이 과연 우리가 매복한 곳에 이르니 아군이 일제히 사격을 가했다. 포성이 산을 움직 이고 그 세가 바람과 같았고 죽은 倭酋(왜놈)가 수십 명에 이르렀다. 적병은 우리와 대적 하기 어렵다는 것을 알고 바람을 맞아 무너지듯 오던 길을 뒤돌아 도망하였다. 우리 군사 들은 승세를 타고 북쪽 몇 리까지 추적하였으며 적은 무기를 버리고 도망하였다. 그러나 이때 날이 너무 추운데다가 해가 저물어 우리도 후퇴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군의 전사자 는 단 한 명이었고 전상자는 몇 명에 지나지 않았다. 창군 초에 이 같은 대첩을 거두니 가히 쾌사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수백 년에 걸쳐 평화가 계속된 탓에 백성들은 전쟁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고 사람이 죽고 다치는 것을 처음 보는 일이라 군사들은 모두 겁을 먹었다. 이리하여 경상도 안동에도 의병이 크게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그곳으로 가 서 그들과 같이 합세하여 왜적을 공격하기로 작정하고 삼삼오오 흩어져 영남을 향해 달려 갔다. 이에 대장은 종사와 참모들과 함께 야밤에 竹嶺을 넘어가다가 鷹岩店에 유숙하였다. 12월 초 9일. 이른 아침에 행군하여 풍기에서 유진하였다. 풍기 유지들을 불러 포군을 소집하는 일을 의논한 결과 모두 응하지 않았다. 그 이유인즉 풍기는 안동진에 속하는 읍 으로서 서쪽에 죽령의 요로가 있고 보니 그 경내의 방어에도 힘이 벅찬데 당신네 湖西 義 陳에 호응할 여유가 없다는 것이었다. 그 인심이 우매하기 이와 같았다. 그러니 의리에 관 한 이야기를 들을 리 없었다. 이들은 또 거짓말을 지어내기를 왜병 수천 명이 우리 의병을 뒤쫓아 죽령을 넘어오고 있다고 하였다. 이 말을 듣고 의병들의 마음이 동요하더니 모두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