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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6 막혀 선비들의 士氣가 떨어져 갔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탐관오리의 욕심이 바다 와 같이 크고 부잣집들의 구리 같은 산이 氷山이 녹듯이 녹아 없어지니 오늘날과 같이 백성들이 도탄에 빠진 일이 없었고 윤리와 도덕이 오늘같이 퇴패한 일도 없었다. 임오 6월의 변(1882년의 임오군란)은 차마 이웃 나라에서 들을까 두렵고 갑신오적의 흉변(1884년의 갑신정변)은 응당 조정신하들에게 거울이 되었으면 하였는데 졸지에 강 화설이 나더니 그것이 재난을 불러들였다. 유생들이 앞을 다투어 불가하다는 상소를 올렸으나 도리어 상소한 사람을 처단하였다. 왜놈과 양놈들이 우리 항구도시의 요지를 마음대로 차지하고 朝野가 저들의 기계문명에 현혹되었다. 오호라! 구구한 필부라도 아 버지를 죽인 원수는 꼭 갚으려 하는데 하물며 이 나라의 당당한 신하로서 임금이 당한 치욕을 잊을 수 있겠는가. 오늘날 湖西(충청도)는 사대부가 사는 문명의 고장이다. 가까이에 嶠南(경상도)이 있어 많은 학자들이 학문을 가르치고 山水 또한 청숙하여 문무에 뛰어난 재목을 많이 배출 하였다. 그들이 변난을 당하여 두루 널리 이 나라를 구제하였으니 많은 선비들에게 기 대되는 바가 컸다. 홀로 산에서 살고 있는 내가 어찌 生民에게 의뢰할 것인가. 만일 머 리를 잘라 원수를 갚지 않는다면 임금의 陪臣들이 逆治와 다를 것이 없을 것이다. 우 리 임금이 황제라고 자칭한 것은 저들의 수작에 속아서 한 큰 잘못이었다. 만일 저들 이 비루한 지식을 가지고 감히 스스로 죽으려고 하는 계략을 짠다면 우리로서도 서로 맹약을 맺어 의병을 일으켜 저들을 몰아내고야 말 것이다. 머리를 깎고 양복을 입은 사람이 어찌 그 죄를, 오랑캐를 물리친 管仲에게 돌릴 것인가. 모두가 떨쳐 일어나 의 병을 일으킬 것을 바라 마지않는다. 을미 12월 지평에 사는 李春永 등도 또한 격문을 발하면서 의병을 일으켰다. 한 부대(의 병)를 거느리고 관동으로부터 단양에 도착하였는데 대장은 李弼凞이고 중군장은 李春永 軍師는 徐相烈, 선봉장은 金白先이었다. 마침내 함께 힘을 모아 復讎保形의 계획(의병)을 세워 단양에 머물렀다. 亂賊輩(개화당)가 의병이 일어난 것을 알고 남몰래 그들의 병정(官 兵, 이하 병정은 관병)을 (단양으로) 파견하였다. 12월 초 7일 관군이 단양 長淮를 침범하니 중군장 이춘영이 포군을 거느리고 적과 접전 하였다. 적군은 수십 명의 사상자를 내고 퇴각하였다. 우리 의병진도 전쟁을 해 본 일이 없는 사람들이라 피를 흘리고 사람이 죽는 것을 보고 모두 두려워하며 각자 흩어지고 말 았으니 이야말로 전투에 이기고 패한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자세한 상황의 뒤의 日記를 참조하라) 단양 전투에서 패전한 후로 선비들은 모두 고개를 떨어뜨리고 사기를 잃었고 軍列이 흩 어지고 말았다. 이에 여러 동지들과 더불어 충의로 타일러 흩어진 병사들을 수습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