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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 착하여, 바로 원장(袁將)에게 통하고, 우리나라 사세의 전말과 찾아온 뜻을 전부 말하며, 또 공과 몇 명의 어진 이들의 순절한 명단을 적어서 보이니, 원장이 깊이 감탄하고 칭찬하 면서 말하기를 “참 의거라.” 하며, 또 말하기를 “지금 일은 자유로 할 수 없다.” 고 하면서, 사례하여 보내는 것이었다. 이 해 11월 7일(양력 12월 11일;편자 주)에 천진을 떠나 금주(錦州)에까지 왔는데, 의암 선생의 계신 곳을 알 길이 없어, 세 사람은 그만 본 국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정유년 봄에 고향으로 돌아와서야, 선생이 아직도 요동 땅에 계 시면서 학문을 강론하고, 농사일을 권장하여 한 모퉁이를 보전할 계획을 한다는 소식을 들 었다. 이번 길의 왕복은 무릇 10개 월 간에 8천5백30리였다. 이 해 겨울에 북행(北行)한 전말을 갖추어 적어서, 그 사유를 공의 영좌(靈座)에 고하였다. 하사실기발문 아 아! 을미·병신년의 사변은 전대(前代)에 일찍이 없었던 일이다. 왜냐하면, 천하의 일은 두 가지로 크게 나눌 수 있으니, 그것은 성명(性命)과 형기(形氣)뿐인 것이다. 다시 말한다 면 토지·금백(金帛)·세력·지위·인민은 곧 천한 국가의 형기인 것이니, 저 중국 오계(五季)시 대의 참변도 그 원인은 형기의 욕심을 채우려 한 데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인의 (仁義)의 이름을 빌려 행세하는 일이 있으니, 이것은 아직도 성명(性命)을 중히 여기기 때 문인 것이다. 대저 성명은 갖추어서 사덕(四德)이 되고, 엮어서 오륜이 되며, 겉에 나타나 서는 예악·법도·의관·문물(文物)의 성대하고도 아름다움이 되는 것이다. 이것이 곧 중화(中 華)가 이적(夷狄)과 다르고, 인류가 금수와 다른 것으로서, 이른바 우리의 ‘도(道)’라는 것 이며, 중화의 맥박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어찌 일찍이 성명(性命)을 거스르고 우리의 도를 멸하여, 일체의 그 성대하고도 아름다운 것을 쓸어버린 일이 저 국모를 시해하고, 군부(君 父)를 가두고 머리를 깎고, 의복을 변경하여 섞여서 이적 금수를 만든 우리나라의 을미·병 신년 사변 같은 것이 있었으랴. 이것이 어찌 전대에 있어서 나라가 망하고 사람이 죽는 보 통의 사변과 함께 말할 수 있으랴. 그러므로 그 의에 죽은 사람은 그 열렬함이 역시 전에 없었던 것이다. 하사 안공 승우(承禹)나 괴은(槐隱) 이공 춘영(春永) 같은 이들은, 지평 고 을에서 창의(倡義)하여 이 나라에서 제일 먼저 일어났으며, 또 의암 선생을 추대하여 그 일을 주장하게 하였으니, 비단 당시에만 훌륭했을 뿐만 아니라 지금까지도 의의 명맥을 계 속하여 오는 것이니, 어찌 크게 다행한 일이 아니겠는가. 더구나 힘을 다하여 적을 치고, 나중에는 그 의에 죽었으니, 그 강경하고 맹렬한 기운이 천지간에 가득 차서 반드시 뭉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