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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9 길을 뚫고 산협 촌락을 지나면서 조밥과 감자로 군사들을 먹였는데, 비를 만나 괴롭고 시 달리지 않는 날이 없었으니, 대개 비가 많이 오는 것도 하늘이 우리 일을 방해하는 것이었 다. 행군하여 홍천·양구 접경에 이르렀는데, 춘천에서 흩어진 군사 수십 명이 머뭇거리며 하는 말이, “앞에 적이 있고 또 비가 와서 총을 쏘지 못하니 나아갈 수 없습니다.” 고 하니, 대장소에서도 역시 생각이 멀리 떠나는데 있었기 때문에 우선 그 말대로 하고, 서소모장만이 혼자서 군사를 거느리고 먼저 떠났다. 그는 가면서 글을 올려 이렇게 말했 다. ‘불행하여 적을 만나 죽더라도 싸우다 죽은 것과 마찬가지이니, 무슨 피차의 구별이 있겠 습니까. 이·안 두 친구가 이미 저세상으로 갔는데, 구차하게 사는 것은 맹세코 하고 싶지 않습니다. 소장이 앞길을 맡아 출동할 것이니, 뒤따라 군사를 지휘하여 나오시기를 바라옵 니다.’ 마침내 양구 교내(橋內)로 들어갔다가 적을 만나 군사가 무너지니, 여러 사람들이 대진 (大陣)과 화합하자고 하였지만 허락하지 않고 낭천(狼川)으로 들어갔는데, 적이 군사를 잠 복시켜 습격하니, 서공(徐公)은 마침내 잡혀서 적을 꾸짖다가 살해를 당하였다. 공의 선봉 장 엄기섭(嚴基燮)이 흩어진 군사를 수습하여 다시 세력을 떨치려 하다가 이루지 못하고 물러나왔다. [‘춘천에서 흩어진 군사’ 이하는 서암의 말임]. 공은 장담(長潭 : 류의암이 유 학을 강론하던 제천 땅) 문하의 높은 제자로서 과연 큰 절개를 세웠다. 우리 군사가 양구 에 이르러서 적이 좁은 목을 지킨다는 말을 듣자, 전진하여 쳐서 함락시키지 못할 것을 알 게 되었다. 여기서 길은 터졌지만, 그러나 적병이 널리 퍼져 가는 곳마다 쫓고 육박하여 회양(淮陽)·덕천(德川)·운산(雲山)에서 모두 세 번이나 적을 만나 다행히도 패전하지는 않았 으나, 운산 싸움이 제일 심하였으며, 군사들의 죽은 수도 이루 헤일 수 없었다. 병신년 7 월 20일(양력 1896년 8월 28일;편자 주)에 초산 아이성(楚山阿耳城)에서 압록강을 건너 남 의 나라로 들어가니, 곧 요서(遼西)의 관전현(寬甸縣) 전자구(碾子溝)의 유탑촌(留塔村)이었 다. 회인현(懷仁縣)에 들어가서는 현관 서본우(徐本愚)가 군사를 데리고 경내로 들어오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므로, 마침내 부하의 군사와 여러 따라온 사람들을 본국으로 돌려보냈 다. 그리고 선생과 따라온 사람들 22명이 회인에서 심양(瀋陽)으로 들어갔는데, 자사(刺 史)[총독이라고도 하였음] 의극당아(依克黨阿)가 역시 의병을 돕는 일을 허락하지 않을 뿐 더러 막연히 아무런 생각조차 없으니, 천하의 사세를 이로써도 알 수 있는 일이었다. 내가 생각하기를, 원세개(袁世凱)가 혹시라도 우리나라 일을 괄시하지 않을까 하여, 드디어 정운 경과 함께 의논을 정하고 길을 떠나면서, 선생을 서소문(西小門)안 여관에서 하직하고 물 러났는데, 또 이종호(李鍾浩)라는 이가 있어, 보따리를 지고 따라 나서니 세 사람이 자연 일행이 되었다. 심양에서 산해관(山海關)으로 들어가 10월에 천진(天津)의 작은 거리에 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