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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8 이 옷이었으며, 공이 생시에 항상 말하기를, 이것이 나의 염의(斂衣)라고 하였음.] 원주(原州) 선비 박수창(朴受昌)은 원래 공과 안면이 없었는데, 이때 와서 글을 보내어 나 에게 조문하고, 부의물도 보내왔다. [그 글에서 이르기를 ‘처음 패한 소식을 듣고는 사실인 지 아닌지 의심이 절반이었는데, 어제 자제를 만나서야 공이 전몰한 사실을 알았으니, 애 통한들 어찌하며, 통극한들 어찌하겠소. 하늘이 우리를 돕지 않아 의거(義擧)가 이렇게 된 것이요. 돈 3냥과 백지 4권을 보내어 상사에 부조합니다.’고 하였다. 제천 사람 이완기(李 琬器)가 40~50냥 돈을 들여 주찬을 많이 만들어 가지고 영호정(映湖亭 ; 의림지 뚝 위에 있음)에서 놀면서 하루 종일 의병의 거사를 욕설하였는데, 사람들이 상쾌스러운 잔치라고 하였다. 정영원(鄭映源)이 을미년 겨울에 서울에 올라가서, 머리 깎고 김익진(金益珍)이 도 망해 달아난 시기를 타서 제천 원이 되었는데, 의병에게 쫓기게 되자, 앙심을 품고 비밀히 가흥(佳興)의 왜적을 시켜서 본진에 불을 놓으려 하다가, 사실이 발각되어 이루지 못하였 다. 그리고는 또 서울의 적에 통하여 본진을 침몰시키려 하였다. 그 내왕하던 서신이 음성 (陰城)에서 탄로되자, 아전이 가지고 와서 고하여 목 베게 되었는데, 힘써 구원하는 자가 있었기 때문에 요행히 죽기를 면하였다. 이런 무리들이 지금까지 의병을 원망하며 우리 공 에 대하여 더욱 심하게 욕설하고 비방하였음]. 공이 순절(殉節)한 후로, 의병의 세력이 크 게 꺾여서 가는 곳마다 달아나고 패하였다. 단양에서 풍기(豊基)로 옮겨 주둔하였는데, 이 튿날에 영남의 적과 싸우다가 불리하여, 또 민백령(岷百嶺)을 넘어 영춘(永春)으로 들어왔 으며, 거기서 다시 청풍(淸風)·충주·음성 등지로 옮겼다. 음성에서 3일간을 크게 싸워서 여 러 번 적의 기세를 꺾었지만, 나중에는 역시 불리하여 여주(驪州)로부터 원주 강천(原州江 川)으로 들어가서 수일간 머물다가 또 신림(新林)으로 들어갔다. 이때 이완하(李完夏)가 공 의 뒤를 이어 중군이 되었지만, 벌써 집으로 돌아가고 진중에 나오지 않았다. 나는 공을 초빈한 다음, 병으로 신음하며 집에 있다가, 류선생 일행이 신림에 이르렀다는 말을 듣고 맞이하여 모시고 모산(茅山)으로 들어와서 유숙하게 되었다. 이튿날, 원용석(元容錫)[자는 복여(福汝)요, 호는 삼계(三戒)인데, 서암(恕庵 : 원용정)의 재종제임]을 임명하여 중군을 삼고, 다시 방학교로 들어갔다가, 또 적의 핍박을 당하고 영 월부(寧越府)로 들어가서 수일을 유한 다음, 또 정선군(旌善郡)으로 옮겨 주둔하였다. 이 때 적병은 사면으로 막아 있고, 궂은비는 계속되니 어찌할 수가 없었다. 드디어 멀리 떠날 계획을 정하였으니, 대개 서북쪽 3도에 인재와 용사가 많아서 믿을 만하므로 여기 가서 일을 만들어 의로운 토벌을 완수할 생각이요, 거기서도 만일 뜻대로 되지 않으면 국경을 넘어 중국으로 들어가서 저 신포서(申包胥 ; 초나라 충신)가 초(楚)나라를 보전하던 계책을 본받고자 한 것이었다. 행군하여 영(嶺) 서쪽 방림(芳林)에 이르니, 여러 장수와 선비들이 반 이상은 사면하고 갔고, 각 진의 장수들 중에는 전군장 정운경(鄭雲慶)과 소토장(召討將) 서상열(徐相說)뿐이며, 두 장수의 거느린 군사가 각기 수백 명뿐이었다. 여기서부터 험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