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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7 아 효도와 우애가 지극하였고, 경서와 사기를 널리 읽고 또 글씨를 잘 써서 일을 맡길 만 하니 참으로 기특한 인재였다. 공이 의병을 일으켜 제천으로 들어오면서 채용하여 종사를 삼았는데, 마침 발병이 나서 따라오지 못하였다. 충주 싸움에서나 재차 제천으로 들어올 적에, 사구는 밤낮으로 함께 일보며 좌우에서 주선하였다. 남성 사변에, 온 진중이 달아나 흩어졌지만, 사구는 혼자 남아서 칼을 짚고 공을 모셨는데, 공이 문득 탄환에 맞아 넘어지 니 적이 달려들어 먼저 공을 끌어가려 하였다. 대개 깃발을 보고서 중군인 줄을 알고, 좋 은 보화로 삼으려 한 것이었다. 사구가 칼을 숨겨 왼쪽으로 짚고 있다가, 갑자기 몸을 돌 리어 바른쪽으로 적을 내리치니, 적들이 당황하여 미처 탄환을 쏘지 못하고 달려들어 총으 로 어지러이 때려서, 눈알이 나오고 얼굴이 터지며 배가 갈라져서 죽었다. 공이 끌려가다 가 먼저 이 광경을 보았다. 그러나 두 사람이 함께 죽은 그 사적은 저 안고경(顔杲卿)과 원이겸(袁履謙)의 죽음 같은 것이었다. 적이 남성을 함락시키고 사면으로 좁혀드는데, 풍우가 계속하여 총알과 화살이 나가지 않 으니, 이로써 여러 진 군사가 함께 흩어지고 감히 그들의 칼날을 당해 내는 자가 없었다. 선생은 휘하의 수백 명 기마병과 함께 저물게 방학교(放鶴橋)로 들어왔는데, 음침한 바람 이 세게 불어 나무가 꺾이다가 밤이 다 지나서야 그쳤다. 이튿날 단양군으로 퇴각하여 머 무르니 이 날이 13일(양력 5월 25일;편자 주)이었다. 14일(양력 5월26일;편자 주)에 여러 군사와 장수들이 학교(鶴橋)를 떠났는데, 공의 소식을 전하는 것이 일정치가 않았다. 박정수(朴貞洙)는 어제 저녁부터 공과 함께 갔으려니 생각 하고 있었는데, 모산촌(茅山村)에 이르니 전혀 종적이 없고, 학교(鶴橋)에 들어가도 역시 그러하였다. 이에 비로소 크게 의심이 나서, 밤을 새우며 졸고 앉았다가, 이튿날 아침에 대장소 여러 장수들에게 사정을 말하고, 제천으로 들어와서 공이 해를 당한 사실을 들었 다. 그래서 읍 남쪽 갈마곡(渴馬谷)에 들어가 양지쪽 언덕에 버려진 여러 시체 중에서 공 의 시체를 찾아내었다. 물러나서 화산(華山)[부의 남쪽 수리 지점에 있음.]의 이용규(李容 奎)[선생의 문인 이정규(李正奎)의 형임.]와 함께, 거적을 준비해서 시체를 지고 화산까지 나왔는데, 이 때 적의 기세가 거창하니 인심이 모두 두려워하여 머물러 장사를 치르지 못 하게 하였다. 나는 그만 포전(浦田)[읍의 북쪽 20리에 있음.]의 이덕연(李悳淵)과 함께, 널 과 옷을 준비하여 18일(양력 5월 30일;편자 주)에 공을 화산 마을에 초빈(初殯)한 다음, 19일(양력 5월 31일;편자 주), 이풍림(李豊林)을 시켜 가서 단양 대장소에 알리게 하였다. [널 재목은 북면(北面) 송한촌(松寒村)에 있었는데, 값이 18냥이다. 이덕연이 돈을 주고 사 왔으며, 관을 짠 목수 이보익(李輔翼)은 포전 사람이요, 수의는 구성삼(具星三)으로부터 부 의(賻儀)로 받은 명주 20자로 겨우 각의(角衣) 위아래를 짓고, 장재소(藏財所)의 삼베 중 포전에 감추어 두었던 것으로 적삼과 중의 하나씩을 만들고 또 소주의(小周衣)를 지었는 데, 겹으로 하였다. 또, 평상시에 입던 심의(深衣)로 염(斂)을 하였는데, 이때, 웃옷이 대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