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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5 ○ 정축일(12일, 양력 1896년 5월 24일;편자 주), 적이 황석촌에서 밤을 이용하여 대덕산 (大德山)으로 올라왔다. 적이 산에 올라가 내려다보면서 공격하니, [대덕산이 극히 험하니 적은 복병이 있는가 하 여 밤새도록 머뭇거리다 마침내 전진해 온즉, 과연 복병이 없으므로 여기서부터는 거침없 이 몰고 나왔다. 대개 이희두(李熙斗)가 파수병을 두지 않았으니 전혀 막아 지키려는 의사 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혹은 말하기를 ‘정운경(鄭雲慶)이 만일 여기 있었더라면 이런 일이 없었을 것이라’고 하였음.] 북창(北滄)의 군사들이 당해 내지 못하고 물러나서 고교(高橋)로 들어가 막았는데, 포성이 땅을 진동하고 연기와 불길이 하늘에 가득 차서 원근이 두렵게 여겨졌다. 이범직(李範稷) 이 이문현(泥門峴)에 복병하였다가 왜장 네 명을 죽이고 그 머리를 베어 바쳤다. 이때 인심이 흉흉하므로, 대장소에서 각 초(哨)의 십장(什長)을 불러 술과 찬을 주며 대의 (大義)로 타이르고, 또 다짐을 받아서 물러나거나 겁내는 일이 없도록 하였다. ○ 적이 북창에 들어왔다. 적이 불을 놓고 사람을 죽이며 약탈하더니, 얼마 후에는 또 산을 타고 가만히 들어왔다. 대저, 우리 군사들이 파수하는 곳은 적이 매양 그 뒤쪽으로 둘러 나와, 바로 제천읍으로 향하였다. 그러므로 덕산에서 한 번 실패를 본 후로는 적은 벌써 깊이 뚫고 들어오고, 우 리 편 여러 장수들은 점점 퇴각하였다. 이날 밤에 여러 진이 모두 제천읍으로 돌아왔는데, 이 때 밤은 이미 깊고 날씨마저 궂은비가 내리므로, 성을 지키는 일과 군사를 공급하는 절 차가 극히 어려워졌다. 공이 읍내의 공형 (公兄 ; 三公兄)과 장사군·마부들을 시켜 방아 찧 고 쌀 씻어 밥을 지어 여러 방수소(防守所)의 군사들에게 공급하게 하였다. 이 날 오후 4시 경에 회오리바람이 중군소(中軍所) 뜰 안에서 일어나, 땅을 휩쓸며 세게 불어 티끌과 모래가 하늘을 덮었다. 또 벽 위의 큰 현판은, 곧 그 집 주인 유씨(兪氏)의 선조가 원이 되었을 때 어필로 써서 하사하여 포양의 총애의 뜻을 표시하였던 것인데, 까 닭없이 땅에 떨어지며 소리가 매우 요란하고 괴이하였다. 온 읍 안이 텅 비어서 싸우는 군사들 외에는 한 사람도 남아 있는 자가 없으며, 남아 지 키는 군사들도 모두 뒤숭숭하여 안정을 못하는데, 공은 계획이 정해져서 전과 같이 코를 골며 잠들었다. [이런 곳에서 공의 평소부터 기른 힘을 볼 수 있음.] ○ 무인일(13일, 양력 1896년 5월 25일;편자 주), 적이 고장림(古場林)으로 들어왔는데, 우리 군사들이 힘써 싸우니 적이 좀 물러갔다. 공이 남산성(南山城) [곧 일작성(一作城)]에서 독전(督戰)하며, 친히 화약을 넣어 포군(砲 軍)들에게 주었다. 청국 사람 여국안(呂國安) 등이 용감하게 싸워서 적 32명을 죽이니, 적 이 군사를 거두어 숲 밖으로 물러나기를 세 번이나 하였다. ○ 적이 다시 나와서 남산성을 함락하니 공이 힘이 다하여 잡히게 되자, 크게 적장을 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