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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3 이다. 그러나 적의 세력은 이때부터 크게 꺾였다. ○ 8일(양력 5월 20일;편자 주), 정운경(鄭雲慶)이 그 부하의 영솔장(領率將) 김교헌(金敎 憲)을 잡아 가두고 보고를 올렸다. 이때 정치가 개화당 손에서 나오고, 관직이 모두 옛 제도를 변경하였으며, 도신(道臣)을 이름하여 관찰사라 하고, 의병을 불러 적당(賊黨)이라 하며, 의병 쪽에서는 관찰사를 왜속 (倭屬)이라 하고, 서울 병정을 가리켜 적당이라 하여 서로 가해(加害)할 염려가 있으므로, 관찰사는 언제나 군사를 경내에 끌어들인 연후에 부임하였다. 이때 원주에는 서울 병정이 없고, 또 관찰사로 임명된 민영기(閔泳綺)는 원래부터 의병에 가깝기 때문에, 의병진의 여 러 장수들에게 청하여 허락을 받고 부임하였다. 그런데 교헌이 망령되이 공을 세울 양으로 제 마음대로 영기를 포박하므로, 운경이 크게 놀라 그 사실을 보고하고 곧 영기를 놓아 주 었다. 영기는 말하기를 “내가 이미 이렇게 되었으니, 제천(堤川)으로 들어가서 한 번 류선생과 군중 모습을 보아 야 하겠다.” 고 하며, 곧 달려가서 선생을 뵙고 이르기를 “의병을 해산할 수도 없으며, 또한 해산하지 않을 수도 없다.” 고 하였다. 하자 선생이 말하기를 “해산할 수 없다는 것은 의(義)요, 해산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은 형세인즉, 나는 의를 따르겠다.” 고 하였다.[“이때 원주에는 서울 병정이 없고”라는 데서부터 여기까지는 서암(恕庵)의 말 임.] 공이 또 묻기를 “그대는 우리가 결코 역적질하지 않는 것을 알고, 우리는 그대가 결코 의병을 공경하지 않을 것을 안다. 이와 같을 뿐이니 더 말할 것이 있겠는가.” 하니, 영기가 “그렇다.” 고 하였다. 공이 말하기를 “그러면 어찌할 것인가.” 하니, 영기가 말하기를 “피차간에 각기 저 할 일을 하는 것뿐이다.” 하고 대답하므로, 공이 물러나와 말하기를 “장기렴보다 훨씬 나은 사람이다.” 고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