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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2 은 노상 말하기를 “맹적을 언제나 목 벨 수 있단 말이냐.” 고 하였는데, 이때 와서 없애려다가 끝내 이루지 못하였다. 공은 적이 원주를 차지하고 있음으로 해서 원주·횡성 간의 길이 막힐까 염려하여, 우필규 (禹弼規)를 시켜 평창(平昌)에 들어가서 북쪽 길을 정탐하게 하였다. 5일(양력 5월 17일;편자 주), 민용호(閔龍鎬)가 종사 김상우(金尙祐)를 보내어 강릉(江陵) 에서 공문을 가지고 왔다. 처음, 공이 민용호가 이쪽 군사를 빼앗아간 것을 매우 한하였는 데, 이 날 흔연히 상호에게 “즉시라도 서로 만나 심정을 말하게 된다면, 손을 잡고 슬픔과 즐거움을 같이할 것이니 우리들 사이에 무슨 간격이 있으리오.” 하였다. ○ 군관 임경준(林景俊)이 죄가 있어 목 베었다. 대장소의 명령이었다. 경준은 한산(韓山) 사람인데 총을 잘 쏘았다. 충주 싸움에서 먼저 북문으로 올라가서 여 러 군사들의 선두가 되었으며, 성을 나오는 날 밤에는 대장을 보호하고 나와서 공이 온 진 중의 제일이었다. 그러나 성질이 간사하고 악독하니 사람들이 많이 좋아하지 않았다. 더구 나 맹영재(孟英在)의 옛 도당이라, 속으로 일호(一鎬)를 두호하며 두 가지 마음을 가지니, 공이 근심하면서도 잡아낼 만한 구실이 없었다. 그는 일찍이 형리(刑吏) 조철식(趙哲植)을 마구 꾸짖으며 매우 거만하게 굴었는데, 이 날 또 여러 무리들과 함께 사사로이 부(府)의 이속 이양익(李良翊)과 마부 박봉기(朴鳳基) 등을 매 때렸다. 그래서 그들의 죄 없이 학대 받은 사실을 말하는 자가 있으므로, 공이 대장소에 품의하고 명하여 베이니 온 군중이 크 게 두려워하였다.[혹은 말하기를, 이 일은 작은 죄에 중한 법을 썼다 하였음.] ○ 신미일(6일, 양력 1896년 5월 18일;편자 주), 이범직(李範稷)·한동직(韓東直)이 심상희 (沈相禧)와 회합하여 장호원 및 가흥을 공격하기로 약속하였다. 심상희가 음죽(陰竹)의 이정참(梨亭站)을 쳐서 함락시키고, 또 문덕현(文德峴)을 쳐서 복 멸시키고, 장호원으로 진군하면서 공문을 보내어 청하기를 신장(申將 : 신지수)으로 가흥을 진공케 하여 적이 서로 구원하지 못하게 하여 달라고 하였다. ○ 신지수(申芝秀)·원규상(元奎常)·이인영(李麟永)이 가흥을 쳐서 함락시키지 못하였다. 여러 장수들이 새벽에 강을 건너 반나절 동안 격전한 나머지 적을 매우 많이 죽였다. 그 러나 둘러친 울타리에 가리워서 적포가 많이 맞지 않으며, 또 화기(火器)가 더디고 둔하여, 다가 들어가는 경우 맞지 않는 총이 날카로운 칼날을 당하지 못할 것 같고, 또 늦게까지 식사를 못하였으므로 여러 장수들이 곧장 함락시키지 못할 것을 짐작하고, 병력을 보전하 는 것만 같지 못하다 생각하고 그만 회군하였다. 처음 신지수 등이 소모진(召募陣)과 약속 하여 협공하기로 하였는데, 한창 싸울 무렵에야 범직이 늦게 오니, 지수 등이 뒤에서 호응 하는 군사가 없이 혼자서 정면으로 적의 공격을 받을 것이 두려웠다. 그러므로 물러난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