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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9 래고 빠른 것이 절주에 맞으며 매우 교묘하고 씩씩하였다. 4월 2일(양력 5월 14일;편자 주), 원주 수성장 구철조(具哲祖)의 보고에, 서울 군사가 왜 적을 데리고 양송치(兩松峙)에 들어왔다 하니, 공이 회답하기를 “가리파(佳利坡)를 굳게 지키고, 또 원서암(元恕庵)과 더불어 의논하여 하라. 부디 안심하 고 염려하지 말라.” 고 하였다. 심상희(沈相禧)·한동직(韓東直)이 잇따라 보고하기를, 적이 안창(安倉)에 들어왔 다고 하였다.[곧 양송치 아래인데, 절험(絶險)하여 한 번 싸울 만하지만, 처음에 생각지 못 하고, 군사를 철수하여 동쪽으로 나왔던 것임.] ○ 여국안(呂國安) 등을 타일러 보내어, 하소(荷沼)에 있는 우군(右軍)에게 나가게 하였다. 국안 등이 우군으로 가는 것은 가흥(佳興)을 치려하기 때문이다. 떠날 때 공이 중화·이적 (夷狄)의 구분과 우리나라에서 명(明)나라를 높이는 큰 의리로써 타이르기를, “공들이 지금 청(淸)나라 의복을 입었더라도 원래는 중화의 옛 종족인즉, 마땅히 명나라 사람으로 자처하여야 할 것이라.” 고 하니, 국안 등이 혼연히 머리를 끄떡였다. 또 말하기를 “우리나라 사람들은 싸우는 데 익숙하지 못하다. 더구나 지금 농사꾼과 산포수들이 밭이 나 갈고 꿩이나 사냥할 줄 아는 실정인데, 다만 충분(忠憤)한 마음만을 가지고서 피차 감 동하고 호응한 것이요, 애당초 무예(武藝)의 한 가지 특기가 있어서가 아니다. 그런데 적의 세력은 맹렬한 불길을 끄는 것같이 잠시 꺼졌다가는 더욱 일어나서, 마침내 온 천하가 오 랑캐의 천지가 되게 되었다.” 고 하며, 입고 있는 우리나라 의관을 가리키며 말하기를, “이것은 명나라 때의 제도다. 옛날 신종황제(神宗皇帝)가 천하의 힘을 다하여 왜란을 구 원하여 주었기 때문에 우리나라의 의관 문물(文物)이 지금까지 보존되어 온 것이며, 예의 (禮義)의 한 명맥이 동쪽의 소중화(小中華)라고 하는 것이니, 신종황제의 공덕이야말로 저 하늘과 같은 것이다. 지금 천하에는 다시 신종황제 같은 임금이 없기 때문에 그만 이렇게 된 것이니 어찌 통한(痛恨)스럽지 않으냐.” 하니, 국안 등이 옳은 말씀이라고 하며 사례하기를 오래하였다. ○ 3일(양력 5월 15일;편자 주), 적이 원주(原州)에 들어오니 여러 장수들이 물러나와 가 리파(佳利坡)에서 방비하였다. 서울 병정이 원주에 들어오니, 이필희(李弼熙)·이원하(李元厦)·구철조(具哲祖) 등이 군사가 적어서 감히 항거하지 못하고 물러나와 가리파에서 방비하였다. 참장 한동직(韓東直)이 보 고하기를, “서울 병정들이 가는 곳에는 의병진에 나온 포수들의 집이 모두 구박을 당하게 되어 촌 락이 소란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