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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8 공이 엄하고 분명하게 아랫사람들을 어거하고, 힘써 절약과 검소로써 규율을 세우며, 부 량배(浮浪輩)들을 깊이 미워하여 그 뜻을 펴지 못하게 하니, 여기서 군소배(群小輩)가 감정 을 품고 다시 서로 맞서게 되었다. 그 중에는 중군으로 황강(黃江) 적과 출전하게 하려는 자도 있었으므로, 공은 밤을 새워가며 장비를 갖추고 명령을 기다리니, 온 군중이 떠들썩 하고 유언비어가 돌았다. 그런데 대장소 참모 박주순(朴冑淳)[같은 문하생으로 힘써 공부한 사람임.]이 다투어서 중지시켰다. 또 중군을 바꾸자는 의논이 있어, 홍승학(洪承學)은 김복 규(金復圭)를 천거하고, 권필수(權珌洙)는 정언조(鄭彥朝)를 천거하여 물의가 비등하였는데, 모두들 다짐하여 말하기를 “공이 아니면 일을 할 수 없다.” 고 하였다. 공은 말하기를 “내가 짐을 벗는 것이니 무엇을 아쉬워하리오, 다만 염려되는 것은 오늘의 대세가 말하기 어려운 곳이 있을까 염려된다. 내가 이춘영(李春永)과 함께 죽기를 작정하고 이 일을 시작 하였는데, 춘영은 벌써 죽었다. 그런데 여러 사람들이 또 외롭게 남아 있는 이 몸을 배척 하려 하니, 앞으로의 일이 과연 어찌될지 모르겠다.” 고 하였다. 이때 길거리마다 적에 대한 보고가 크게 전해지므로, 공은 이병회 등과 함께 각처 성지 여러 군사들을 순시하며 급한 일을 감독하였는데, 이윽고 무사하여졌다. ○ 갑자일(29일,양력 1896년 5월 11일;편자 주), 대장소에서 군사를 위로하여 북창(北滄) 에 이르렀다. 북창에서 다시 각 처 파수소에 이르렀다. 30일(양력 5월 12일;편자 주)에 청국인(淸國人) 여국안(呂國安) 등 7명이 진중으로 와서, 자진하여 왜적을 원수같이 여기는 뜻을 말하고, 공이 후히 대우하고 대략 현하 정세와 화 하(華夏) 이적(夷狄)의 큰 분별을 말하였다. 이들은 이인영(李麟榮)이 모집해 온 자들이다. 홍승학(洪承學)은 호를 임사(林士)라 하며, 문장과 언변에 능하고, 문부를 맡아서 대장소 의 신임을 받았고, 우기정(禹冀鼎)은 벼슬이 승지(承旨)에 까지 올랐으며, 원래부터 적장과 친하므로 대장소에서 생각하기를, 적장과 만나 자세하게 토론하면 그의 그릇된 생각을 깨 우칠 수 있을 것이라 하여 적진 중으로 보냈었는데, 돌아와서 보고하기를, 각기 의견을 고 집하여 끝내합의를 보지 못하였다고 하였다. 또 기렴(基濂)이 사사로이 우기정에게 의병 소임을 사면하고 나오라고 시키며 연연한 뜻을 보이니, 기정이 과연 병을 핑계하고 힘써 사면하기를 청원하였는데, 대장소에서 허락하였다. 승학도 역시 적병이 제천에 들어오기 하루 전에 병을 핑계로 돌아갔는데, 기렴이 제천에 들어오자, 우·홍 두 사람이 모두 그 아 들을 보내어 기렴에게 문안하고 돌아갔으니, 그들의 처신과 행사는 빤히 알 수 있는 것이 다. 고장림(古場林)에서 점고하고 이희두(李熙斗)가 칼춤 추는 것으로 여국안(呂國安) 등을 초청하여 잔치하자, 국안이 그 부관(副官) 한 명을 시켜 칼춤 추며 회답하게 하였는데, 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