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6page

236 자가 잘 알지 못하고 한 일이라 그만 두었다. ○ 기미일(24일, 양력 1896 년5월 6일;편자 주), 이철화(李哲化)가 모집한 괴산(槐山)군사 5초(五哨)가 도착하였다. 이철화는 원주(原州)에 살았는데, 군사를 모집하여 가지고 온 것이다. 의병이 패하자 곧 병대관(兵隊官)이 되었다. 이때 공이 눈병을 알았는데, 군무가 총망하여 치료할 겨를이 없었다. 날마다 반드시 부모 님께 문안하면서도 한 번 집에서 자는 일이 없으므로, 자고 와도 좋다고 권하니, 대답하기 를 “지금 주상(主上)께서 배필이 없으신데, 신민이 어찌 안방에서 아내와 동침하랴.” 고 하였다. ○ 괴산에서 새로 온 군사들에게 서약하였다. 대략 이르기를 “나라의 역적을 다 없애고 원수의 왜를 섬멸하여, 한편으로는 국모의 원수를 갚고, 한편 으로는 중국의 명맥을 보전하여야 할 것이니, 이것은 천지신명이 나와 너희들에게 바란 적 이 이미 오래인 것이다. 지금 너희들이 기구하게 멀리 오면서, 적의 진지를 뚫고 지나는 것이 몹시 수고롭고 또 위태로운 일이었는데, 몸을 바쳐 모병에 응하였으니 또한 장하지 않을까. 한번 맹서한 장수와 군사의 의(義)는 은정과 사랑이 형제간보다 더하고, 엄하고 무 서움은 부월(斧鉞)보다 심한 것이다. 죽도록 변하지 말고 오직 명령에 복종하여 큰 공을 이루게 하라.” 고 하였다. 25일(양력 5월 7일;편자 주), 이때 적장 장기렴(張基濂)이 황강(黃江)을 막아 있으므로, 양 곡을 운반하는 길이 막혀 군색하였다. 북쪽으로 관동지방에서부터 남쪽으로 4군(郡)에 이 르기까지에 백성들이 모두가 피폐하였으나, 적을 깨뜨리고 남쪽으로 나가지 않으면 오래 머무를 수가 없었다. 이강년·이향구(李馨九) 등이 여러 번 나가 토벌하기를 청하였으나, 여 러 사람들이 서울 병정 때문에 난처하게 여기며 머뭇거린 지가 오래였다. ○ 권흥일(權興一)이 영남(嶺南)으로 옮겨 주둔하여 군수 물자를 취하기를 청하였는데, 품 의하고 허락하지 않았다. 공의 의논에 대략 이르기를, “방금 적병이 다가오는데, 우리 군사가 만일 영남으로 나간다면, 군수 공급은 비록 유익 하다 할지라도, 밖으로는 약함을 보이는 것이니, 많은 사람들이 보고 듣는 데 스스로 위엄 과 신망을 손상함이 없겠는가. 또 사방에서들 힘을 다하여 군수품을 제공하면서 기대하는 것이 무엇 때문인가. 그런데 하루아침에 다 버리고, 영을 넘어 막연히 간다는 것이 어찌 차마 할 수 있는 일이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