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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5 23일(양력 5월 5일;편자 주), 공이 독송정(獨松亭)에서 군사를 점고 마친 다음, 읍을 둘러 싼 각 봉우리의 성보(城堡)를 순찰하다가, 동남쪽과 서쪽 성보를 지나 칠리봉(七里峰)에 이 르러서는, 일하는 백성들이 흙을 지고 삽을 든 자를 보고 불쌍히 여기며 하는 말이 “백성들이 장차 다 죽게 되겠으니, 내가 먼저 죽어서 이 백성들이 수고하는 모습을 보지 않았으면 좋겠다.” 고 하였다. 좌군장 정원모(鄭遠謀)의 보고서에 서울 군사가 왜적을 끌고 들어와 침범하려 한다고 하 자, 공이 웃으며 말하기를 “두 적이 들어와 침범하니[다른 곳에는 합세하여 온다고 하였음.] 지금부터 큰 싸움을 하 게 될 것이다. 이것이 우리들의 의거한 본색이다.” 고 하였다. 원용정(元容正)은 공과 동문수학한 옛 친구다. [용정은 원주(原州) 사람인데, 젊어서 호기 있고 용감하고 담력이 있으며, 힘이 장한 자를 굴복시킬 만하더니, 선비의 문하에 들어오 면서는 어질고 착해졌고, 군중에 있으면서는 근무를 단속하기를 엄히 하였다. 선생을 따라 중국에 들어가서는 문장과의 응답으로 요동에서 알려졌으며, 본국으로 돌아와서는 문을 닫 고 학문을 강구(講究)하였는데, 집이 지독히 가난하였지만 태연하였다. 자는 치화(致和)요, 호는 서암(恕庵)이다]. 데려다 의논하였는데 말하기를 “그대가 어찌하여 기계 만드는 것을 준절히 거절하였는가. 어느 한쪽에만 치우치면 일에 방해가 될까 염려된다.” 고 하였다. 공이 말하기를 “기계가 쓸 만하다면 내가 무엇 때문에 그만 두겠소. 지금 모두들 죽을까 겁나서 달리 핑 계할 만한 것이 없기 때문에, 기계를 만들어 내라는 말을 하는 것이요, 처음 소나무 널로 방패를 제조한다고 수천금의 비용을 허비하였지만, 효험이란 조금도 없이 적에게 불타 버 리고 말았소. 계속해서 쇠가죽으로 하느니, 편철로 하느니, 또는 인자(人字) 방패를 만드느 니 하는 말이 분분하게 일어났지만, 어떤 것은 포환에 곧장 두어 겹이 뚫려 당랑(螳螂) 이 수레바퀴를 막는 것 같고, 혹 어떤 것은 무거워서 수레에 실어가기가 힘들었는데 이것이 무슨 도움이 되겠소. 그래서 내가 단연코 배척한 것이요.” 하였다. [처음, 이상교(李相敎)라는 이가 있어, 억지로 청하여 영월에서 방패를 제조하였는 데, 영월에서 충주까지 운반하기에 백성을 수고롭히고 재물을 허비함이 너무 많았으며, 싸 우게 되자 탄환이 종잇장 뚫듯 하였다. 그 밖에도 많은 방패가 있었지만 그 어느 것도 탄 환을 방비하지 못하였음.] 단양 고을 김희경(金喜卿)이 중군의 목인(木印)을 도둑질하여 사용한 일[위조하여 사용하 였다는 것임.]로 심문을 받았는데, 자세히 알아본즉, 단양수성 중군의 인장이었다고 말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