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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4 하여 수백 명을 얻었는데, 혹시 청주·공주 지방 토왜(土倭 : 왜의 앞잡이)에게 곤욕을 당하 여 쉽게 오지 못할까 염려되어 군사를 보내어 맞이하고, 그들이 돌아오는 길을 열어 놓게 하였다. 범직이 떠난 다음, 공이 손수 도끼를 들고 앞장서서 나무를 베어 권면하니, 군사 들도 일제히 베어 실어 와서 군영 뜰이 모두 가득 찼다. 백성들이 이 말을 듣고서 모두들 감격하고 기뻐하면서 말하기를, “수고를 나눈 것은 비록 얼마 되지 않지만, 그 마음씨는 비할 데 없다.” 고 하였다. 탁지대신 심상훈이 군중에 와서 하룻밤을 자고 떠났다. 류선생께 청하여 그 작은아들 장 섭(璋燮)을 제자 삼게 하여 달라고 하고, 또 임금께 호소하여 서울 병정들을 철수하게 한 다고 하니, 사람들이 많이 믿었다. 이강년의 보고에 “적병들은 저희들끼리 의논하기를, 비가 올 때나 어두운 밤을 이용하여, 산을 타고 잠복 하여 들어가서, 의병의 진중을 습격하자고 한다.” 고 했다. 서신을 영춘(永春) 수성장(守城將)에게 보내어 부유한 집안에서 군수품을 바치게 할 것을 청하며 이르기를 “이번 거사는 원래가 부득이한 일이며, 부유한 집안에 청구하는 것도 역시 부득이한 일이 다. 부유한 집에서 만일 이러한 부득이한 뜻을 잘 인식한다면, 어찌 그들이 내지 않겠느 냐.” 하니 듣는 사람들이 그의 지극한 뜻에 감복하였다. 용사를 힘써 천거하는 사람이 있었는 데, 공은 이렇게 말하였다. “우리는 의(義)로써 할 뿐이며, 용맹이나 자주를 숭상하지 않는다. 다만 마음과 힘을 다하 여, 국가를 위해서 원수를 갚고, 치욕(恥辱)을 씻으며 선성(先聖)을 위해서 중화를 높이고, 이적을 물리치며 백성들을 위해서 머리털을 보전하게 하는 일이 있을 뿐이다. 만일 저 하 늘이 끝내 화를 거두지 않아, 성을 등지고 최후의 결전을 하는 일이 있게 된다면, 한 번 죽음으로써 우리의 의를 다할 수 있는 것이다. 또 초나라 상장군인 송의(宋義)가 아장 항 적(項籍)에게 죽었고, 한나라 장비(張飛)가 부하 범강(范彊)에게 죽었으니, 이것은 용사는 제어하기 어렵고 패역(悖逆)하기 쉬운 까닭이 아니겠는가. 더구나 용맹이 있는 자는 우리 를 위해 그 용맹을 다하지 않으며, 재주가 있는 자는 우리를 위해 그 재주를 다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을 취해서 무엇 하랴.” 고 하였다.[이런 말은 여러 번 있었다.] ○ 신지수(申芝秀)가 하소진(荷沼津)에 복병하였다가 반쯤 건너는 적을 맞아 쳐서 깨뜨렸 다. 적이 패하여 달아나고 충주로 들어가지 못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