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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2 홍대석(洪大錫)이 방흥동(芳興洞) 좁은 목을 방어하여 지키다가 적의 첩자(諜者)를 잡았는 데, 좌우 사람들이 죽이려 하니 대석이 용서하고, 역리(逆理)와 순리, 중화(中華)와 이적(夷 狄)의 구분으로 타일렀는데, 말이 극히 격렬하였었다. 이윽고 그는 두어 명 말 탄 사람과 함께 본진으로 들어와, 적의 정세 및 수어(守禦)에 관한 일들을 자세히 품의한 다음, 하루 밤을 자고 떠났다. 17일(양력 4월 29일;편자 주), 공이 이승휘(李承徽)에게 말하기를 “우리가 고집하는 일은 오직 대의뿐이니, 그 대의란 죽기 한하고 흔들리지 않는 그것이 다. 우리의 기계와 병력이 비록 저들만은 못하다 하지만, 그래도 백중간(伯仲間)에 속하는 일인데, 다만 한 죽음을 걸고 싸우는 것은 저들이 우리를 대적하지 못하는 일이다. 저들은 죽기를 무서워하고 살기를 탐내는 마음으로 이번 개화역당(開化逆黨)의 변고를 일으킨 것 이며, 우리는 죽기를 무릅쓰고 의기를 분발하여 원수를 갚고 머리털을 보전하려는 것이니, 이것은 우리가 단연코 자부하는 일인즉, 우리는 어찌 저들을 무서워할 것인가. 또 저들이 비록 우리를 공격하지만 마음으로는 역시 스스로 그른 것을 아는 것이니, 스스로 그른 것 을 알면서 하는 자는 죽기를 무서워하기 때문이며, 우리가 비록 저들을 대적하지만 역시 마음으로는 패할 줄을 아는데, 자신이 패할 줄을 알면서도 하는 것은 의에 의지하기 때문 이라.” 고 하였다.[공의 언론이 대개 감격하여 울게 하는 곳이 많은데, 이런 곳은 더욱 격렬하여 완악한 자를 염치 있게 하고, 나약한 자를 자립하게 하는 것임.] 부유한 집안에 효유하여 군량을 도와주기를 청원하며 말하기를 “오늘의 이 일은 사실 부득이하여 하는 것이다. 지극히 경한 재물로 지극히 중한 의리를 행하는 것이라면 사람으로서 아니 할 수 없는 일이니, 어찌 아니 할 수 있겠는가.” 고 하였다. 전 이조판서 심상훈(沈相薰)은 임금과 이종(姨從)이 되는 척신(戚臣)으로 명망과 지위가 혁혁하였는데, 갑신정변 때부터 꾀를 내어 제 몸을 보전하더니, 이때에 와서는 소위 탁지 대신(度支大臣)이 되니, 나라의 변고는 잇따라 일어나지만 그의 전원(田園)은 날로 늘어나 며, 오직 부자들만이 가까이하여 뽑아서 지방관을 삼았다. 을미년 국모의 참변이 일어나 자, 적이 국모를 폐하여 서인(庶人)을 삼으려 하였는데, 거부하는 말 한 마디 하지 않고, [혹은 이르기를 수의(收議)라는 혈서(血書)에 서명하였다고도 함.] 머리 풀고 산중으로 들 어간다고 큰 소리를 하면서 벽 위에 글을 써 붙이고 제천으로 돌아와 숨어 있었다. 이때에 와서는 영월 선암촌(仙岩村)에 들어가 있다가, 그 아들 이섭(理燮)과 함께 선유(宣 諭)한다고 하면서, 적을 끌고 와서 엿보는 것이었다. 수일 후에 이섭과 근영(根永)이 단신 으로 군중에 들어와서, 전일에 하던 예로 대장소와 중군에 보이고, 이른바 선유하는 문자 라는 것을 가늘게 써서 사사서간 속에 넣었는데, 서울 소식을 적어 보이는 것같이 하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