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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 “이 한 몸이 어느 날에 죽을는지 모른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날 개화당원이 나의 제도를 모두 뒤덮고, 반드시 가외의 물건을 내라고 할 것이니, 전들 어찌 보전하랴 또 반찬이 무 엇이기에, 제 입만을 돋우기 위하여 쓰고 단것을 같이하는 의리에 부끄러움이 있게 해서 되겠느냐.” 고 하였다. 공은 자부심이 굉장하여, 말을 할 적이나 글을 쓸 때에는 매양 미사인(未死人)[아직 죽지 않았다는 뜻]이라 칭하였다. 누가 “그것이 너무 과한 말이 아닙니까.” 하고 물으니, 공이 대답하기를 “내가 이춘영(李春永)과 함께 제일 먼저 의병을 일으켰는데, 그것은 천하에 대의(大義)를 펴기 위함이었다. 그런데 발을 내디딘 처음에 춘영이 문득 저 할 일을 다 하고 갔으니, 비 록 성공은 못하였지만 그 분수와 의리는 다한 것이다. 고독한 나의 처지는 한갓 지기지우 (知己之友)를 잃은 슬픔만이 아닌데, 더구나 인심은 무상하고 명절(名節)을 온전하기 어려 워 관 뚜껑을 덮기 전에는 다짐하여 말할 수가 없다. 어찌하여 충주 싸움에 왜놈의 그 비 쏟아지듯 하는 탄환을 맞지 않고 엉성한 병든 몸이 아직도 남아서 혼자 수고로운 것인가.” 고 하였다. 16일(양력 4월 28일;편자 주), 풍기(豊基) 사람 권흥일(權興一)이 노성(老成)하고 인망이 있어, 일찍이 서소모장(徐召募將)의 인정을 받았는데, 이번에 사람을 보내어 대장소로 맞 아들인 다음, 따르는 사람들을 물리치고 친히 사관으로 방문하였다. 지평(砥平) 유기량(柳冀亮)에게 회답하는 글에 이르기를 ‘영력(永曆) 병신년 모월 일에 죽을 몸이 아직 죽지 않은 아우 안모(安某)는, 기우는 나라 를 붙잡으려 해도 나라는 더욱 위태롭고, 백성을 편안히 하려 해도 백성은 더욱 피폐하니, 어찌하면 좋겠소.’ 하였다. ○ 대장소의 명령으로 원주(原州) 별모장(別募將)을 불렀다. 그 글에 이르기를 ‘죽음을 걸고 결전하자는 것은 묻지 않아도 같은 의견일 것이다. 그렇다면 불일간 모여서 한 깃발 아래 죽는 것이 옳다. 사세가 만분 위태로운 지경에 이르렀으니, 오직 성을 등지 고 적과 싸우는 일이 있을 뿐이다.’ 고 하였다. 위로부터 칙유서(勅諭書)와 심이섭·홍병진 등의 흉악한 글이 모두 왔는데, 군사를 해산하 고 선유서에 따를 것을 권했고, 연호와 글 내용이 모두 자주국(自主國)으로 써서 ‘건양(建 陽) 원년 5월 일’이라고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