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page

230 갚기를 맹서하니, 공이 불러서 어루만지며 매우 칭찬하였음.] ○ 기유일(14일, 양력 1896년 4월 26일;편자 주), 이향구·정운경(鄭雲慶)이 두 번째 보고 에, 적장 장기렴이 강을 건너 황석(黃石)으로 들어왔다고 하므로, 이강년(李康䄵)이 군사를 거느리고 남쪽으로 나갔다. 이때, 원근 지방에서들 모두 무서워 떨고 고을 안이 비었는데, 공은 평상시와 같이 코를 골고 잠들었다. 날이 밝자, 이강년을 충주로 보냈는데, 떠날 때에 훈계하기를 “조심하여 함부로 덤비는 일이 없게 하시오. 대저 위엄을 기르고 무겁게 보여, 적으로 하 여금 감히 범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 상이요, 백전백승하여 공을 이루고 이름을 날리는 것 이 그 다음이요.” 하였다. 대장소의 종사 심이섭(沈理燮)·홍병진(洪炳晋)·이근영(李根永)이 말미를 얻어 서울로 올라 갔다가 적과 함께 내려왔는데, 얼마 후에 적진에서 와 보이고 갔다. 달려와서 고하는 사람의 말이 “평창 수성장이 북쪽에서 오는 적을 정탐하고 있다.” 고 하였다. 14일(양력 4월 26일;편자 주) 적이 황강(黃江)에 머물고, 혹 서창(西倉)으로 정찰하여 들 어오는데, 전군장 정운경·홍대석 등이 군사를 나누어 북창과 방흥동(芳興洞) 좁은 어구를 지켰다. 첩보(牒報)가 왔는데 “참령 장기렴과 심이섭·홍병진·이근영 등이 적병을 데리고 왔다.” 고 하였다. 이에 앞서, 심·홍·이 세 사람이 제천에서 충주 싸움에 종군한 때에, 겉으로는 일을 본다 하였으나, 공은 유독 그들의 모호한 행동을 의심 하였는데, 제천에 돌아오게 되 면서는 가서 가흥의 적을 정탐한다 칭하고 바로 서울로 갔으며, 일찍이 그가 보낸 편지에 ‘왕명을 항거하는 것은 의(義)가 아니라‘는 말이 있어, 보는 사람들이 깜짝 놀랐는데, 이제 보니 과연 그러했다. 맹산 이승휘(孟山 李承徽)가 처음에 양곡 운반하는 일을 맡았는데, 부모를 뵈러 간다고 하며 말미를 얻어 간 뒤로는 기한이 지나도록 오지 않더니, 이때에 역 시 적의 진중으로부터 와서 적진의 여러 우두머리들이 내가 살고 있는 충주 땅을 지나다 가 찾아와서 같이 가자 하기에 따라서 본진으로 왔다고 하며, 스스로 의아스러운 행동을 변명하므로, 대접을 전과 같이 하였다. 본 고을 호장 안재영(安載榮)이 따로 공에게 식사 대접하는 일을 맡았는데, 공이 물리치 고 여러 종사들과 큰 상에서 함께 먹었다. 어떤 이는 “너무 하지 않습니까.” 하니, 공이 말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