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9page

229 휴가를 청원하는 사람이 있으면 말하기를 “지금 이 의거는 천고의 성현 영웅도 일찍이 하지 못하였던 일이다. 성현은 다만 이 이치 만을 말하였을 뿐이지, 어찌 일찍이 몸소 해 보았겠느냐. 너희들이 능히 성현도 일찍이 하 지 못하였던 일에 참여하였는데, 만일 잠시라도 제 자리를 떠났다가 갑자기 적의 변고가 있게 된다면, 다른 사람은 제 할 일을 다 하였는데 혼자서만 못하게 될 것이니 어찌 낭패 되지 않겠느냐.” 고 하였다. 정선 고을 수성장의 보고에 남진(南陣)의 소모장 황기룡(黃起龍)·지우석(池禹錫) 등이 산 읍에 드나들면서 침해하는 일이 동학당보다도 심하니 금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하였다. ○ 10부에서 어명이라고 하면서 새 관직인 참령(參領) 장기렴(張基濂)을 보내어 군사를 거느리고 충주에 오니, 장차 의병을 침범하려는 것이다. 기렴은 전에 영묘조의 충숙공(忠 肅公) 인식(寅植)의 4대손이다. 방대(方垈) 파수장 이향구(李馨九)의 보고에 ‘서울 병정이 서창(西倉)에 들어오고, 또 충주 북창(北滄)을 침범하니, 후군 선봉과의 교전이 곧 있을 것이라’고 하였다. 14일(양력 4월 26일;편자 주), 운량감독(運糧監督) 이범직(李範稷)의 보고에 ‘서울 병정이 충주 용당(龍塘)에 들어와서 장차 가흥(佳興)의 적과 합하여 제천(堤川)을 치려 한다’고 하 였다. 군대 장부가 뒤섞여 있으므로, 서기 최영규(崔榮奎)를 명하여 고쳐 정리하게 하였다.[영규 는 평창 고을 사람임.] ○ 지평에서 전몰한 장사 손덕화(孫德化)·김정순(金正純)·김성화(金聖化) 3명을 망제(望祭) 하였다. 공이 군사들을 제천부의 남쪽 남당촌(南塘村)에 진 치니, 위의(威儀)가 삼엄하였다. 3장사 를 제사한 글은 아래와 같다. ‘아, 아! 슬프다. 우리나라 운수가 불행하고 천운이 기구하여, 적신(賊臣)이 장권(掌權)하 고 섬 오랑캐가 흉악하게 덤비도다. 독한 칼날이 문득 국모에게 미치고 머리 깎는 칼이 면 류관에까지 미쳤으니, 만고의 망극한 변고가 이보다 더 심한 적이 없었다. 여기서 의의 깃 발을 들고, 요사한 무리들을 기어이 쓸어 없애려 하는데, 그대들 세 사람이 분발하여 몸을 돌보지 않고 근로하며 여러 번 싸우다가, 끝내는 가흥 싸움에서 사몰하였다. 아, 아! 사람이 세상에 나매 누구인들 한 번 죽지 않으리오마는, 죽을 자리에서 죽는 것 이 귀하도다. 그대들의 정경이 가련한 것은 눈앞의 일이요, 절의가 가상하다고 칭찬받는 것은 백대의 영광이니, 어찌 장하지 않으며, 어찌 아름답지 않으랴. 삼가 박주로써 하늘가 를 바라보며 곡하노니, 바라건대 충혼(忠魂)은 내려와서 있는 듯이 나의 좌우를 보호하라, [이때, 덕하의 아들 용문(龍門)이 나이 17세였는데, 총쏘기를 배워 종군하며 아버지의 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