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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8 시덕거리며 편하게 지내면서, 이기고 지는 것은 내 알 바 아니다 하고, 능히 나의 고심과 혈성(血誠)을 알아서 성의를 다하는 자는 극히 드무니, 아아 뉘와 더불어 일을 함께 할 것 인가.” 하며 통탄하고 눈물을 흘렸다. 공이 엄하고 분명하게 아랫사람들을 통솔하니, 감히 속이고 태만하는 자가 없었다. 아랫 사람들이 잘못하는 일이 있으면 그 정도를 헤아려 처벌하고, 일찍이 친근한 사이라고 해서 사정으로 두둔해 주는 일이 없으며, 혹시 대장소에서 용서하면 부득이 따르지만, 매우 난 처한 기색을 보였다. 일찍이 말하기를 “장수된 자는 인정과 사랑이 독실하지 못함을 근심할 것이 아니라, 기율(紀律)이 엄숙하 지 못함을 근심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손무자(孫武子)가 천하에 대적할 사람이 없었 던 것은 법을 분명히 하였기 때문인 것이다. 법을 밝히는 것은 별 것이 아니라, 법을 범하 는 자 있으면 반드시 처단해, 군율(軍律)을 어기지 못하는 것이 마치 산악의 움직이지 않 는 것과 같음을 분명히 알게 한 후 에야만 그 명령 지휘를 실행할 수 있는 것이니, 어찌 일찍이 군사를 사랑하지 않고 자기 잘하는 것만을 자랑하는 자 있으랴. 비록 보잘 것 없는 도적의 괴수라도 제 무리를 사랑할 줄은 안다.” 고 하였다. 심상희(沈相禧)의 보고에 “서울 병정이 이천(利川)까지 들어왔으니 마음이 매우 답답하다.” 고 하였다. 공이 대답하기를 “오직 나의 의(義)를 다할 뿐이니 무엇이 답답할 것이 있으랴.” 고 하였다. 군사들이 의복 빠는 삯을 청구하는데 그 비용 역시 적지 않았다. 공이 말하기를 “재물을 아껴 쓰는 것이 우리 군중의 규정이다. 더구나 초야(草野)의 신민으로서 관청 양 곡과 관청 재물을 가져다 쓰는 것이 얼마나 외람된 일이냐. 조금이라도 헛되게 허비하여 거듭 백성의 힘을 손상할 수는 없는 일인데, 더구나 계속하기 어려운 탄식이 날마다 백배 나 더해 감에 있어서랴. 마땅히 그 곳 백성들로 하여금 옷을 빨아 대고 품삯은 받지 말게 하라.” 고 하였다. 대장소 참모 박주순(朴冑淳)이 청풍(淸風) 두산동(斗山洞) 소임에게 전갈하여, 응현(鷹峴) 을 막아 지키게 하라고 하므로 그 말대로 하였다. 우군 중군 원우규(元友珪)가 3초(哨)의 병력을 거느리고 진중으로 나갔다. 이때 적병이 틈 을 노리고 서울 군사가 기회를 엿보니, 원근에 경계가 엄중하였다. 공이 매양 군사들 중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