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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6 승군(僧軍)을 파하여 각각 본 절로 돌려보냈으니, 이는 비용을 덜기 위함이었다. ○ 군사들을 시켜 땔나무를 운반하게 하였다. 공이 본부 문루에 올라가 군사 점고를 마친 다음, 기를 세우고 북을 울리며 군사를 정돈 하여 나가니, 성중 남녀들의 구경하는 자 길을 메웠다. 모산(茅山)으로 진군하여 바로 신담 (新潭)으로 들어가니, 혹은 진을 옮기는가 하고, 혹은 군사를 훈련하는가 생각하며 그 뜻을 깨닫지 못하였다. 그런데 결국 그들에게 내려진 영은 ‘땔나무를 운반하라’는 것이었다. 그 말을 듣고 진중은 물론, 구경하는 백성들도 모두 크게 웃었다. 이때 백성들을 시켜 땔나무 를 공급하게 하여, 그들은 나무를 찍고 운반하고 하므로, 공은 깊이 동정하여 이렇게 해 본 것이었다. 군사들이 모두 손에 병기를 들고 찍은 나무를 등에 지고 돌아오며, 참모·보 좌관 이하 한 사람도 그저 가는 사람이 없었다. 공도 말 위에서 조금 가지고 가려 하며 말하기를 “옛날 당(唐)나라 태종(太宗)이 말 위에서 군사들이 등에 진 흙이 제일 무겁게 보이는 것 을 나누어 가졌으니, 장수의 도리는 마땅히 이러해야 한다.” 고 하였다. 그러나 좌우의 사람들이 힘써 말렸다. 대장소의 명령으로 이병회(李秉會)를 감군(監軍)으로 삼아, 중군소(中軍所) 안팎의 일을 모두 맡아보게 하였다. 이병회가 우필규(禹弼圭)와 함께 평창으로 갔다. 영 서쪽 사람들이 아직도 민용호(閔龍鎬) 의 편이 되는 자가 많으므로, 가서 향배를 분명히 일러 줄 예정이라고 하였다.[특별히 이 것으로 구실을 삼은 것이었음.] ○ 김동관(金東觀)의 서신을 회답하였다. 대략 이르기를, ‘나는 어제와 같은 하나의 병든 사람이라, 항상 병이나 화(禍)에 죽고 의에 죽지 못할까 염려됩니다. 무심한 저 하늘이 끝내 화를 내릴 마음을 돌이키지 않으니 어찌하리까.’ 고 하였다. 9일(양력 4월 21일;편자 주), 정선군에서 공급하는 화약을 면제하여 여러 가지 폐단을 없 애주기를 청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이강년이 제천으로 들어온 후에 왜군들이 동창(東倉)으로 들어와서 수십 채의 집을 불태 웠다. ○ 포군 문문쇠(文汶釗)가 참형(斬刑)을 당하게 되었는데, 대장소의 영으로 용서하였다. 처음 대장소에서 영월(寧越)로부터 제천(堤川)으로 나올 때에 명령하기를, “까닭 없이 포를 터뜨리는 자는 목 베인다.” 고 하였다. 군사들이 혹 총기를 개조하여 시험해 보려면 반드시 대장소에 청원한 후에 시 험하게 되었는데, 이 날 한 군사가 맨 앞에서 시험하니 여러 군사들이 잇따라 터뜨리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