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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5 을 당하기까지 하여 형체를 가려낼 수 없어 한 무덤에 같이 묻히게 되었으니, 혼령이라도 서로 의지할지어다. 아아! 혹독한 화란과 참혹한 순절이 예로부터 많았지만, 오늘의 그대 들처럼 심한 경우는 아직 없었도다. 이 어찌 우리 군중에서만 애통할 일이랴. 천지신명도 역시 감동할 일이로다. 삼가 제문을 지어 박주나마 올리노니, 혼령이여 흠향할지어다.’ 고 하였다. 유격중군(遊擊中軍) 윤기영(尹基榮)이 패할 때에, 흩어진 포군 11명이 제 마음대로 집으 로 돌아갔다. 이날 기영이 그들을 거느리고 왔기로 명하여 결박하여 목 베라고 하였는데, 잘못을 고치겠다고 다짐을 하므로 사면해 주었다. 좌우의 사람들이 힘써 청원하였기 때문 이었다. 이강년이 동창에서 돌아오니 공이 만나 보고 매우 즐거워하며 함께 군사와 말을 점고하 고, 또 진법을 익히며 무예를 가르쳤는데, 대열과 절차가 삼엄(森嚴)하여 볼 만하였다. 공이 산곡 정덕오(山谷鄭德吾)에게 말하기를 “지금 대행 왕비께 제사 드리는 의식이 궐하였고, 주상전하께 수라(水剌)의 공급이 모자 라니, 신민(臣民)된 자로서 어찌 감히 따사로이 거처하고 배불리 먹기를 생각하랴. 비록 군 량 공급에 굶어죽는 일이 있더라도, 이것은 역시 의에 죽는 일이다. 그러므로 장병은 싸움 터에서 죽고, 곁의 사람들은 군량 공급에 진력하는 것이 다 같이 원수를 갚는 뜻이 된다. 더구나 몸과 재물은 경중이 있지 않은가. 우리들이 오늘에 있어서 우리의 할 일은 힘을 함 께 하고, 일을 서로 도와서 기어코 원수를 갚고 머리털을 보존하는 것뿐이다.” 고 하였다. 평창(平昌) 고을 아전 이근숙(李根肅)의 보고에 ‘횡성(橫城 )군사 수백 명이 방림(芳林)으 로 들어와서, 장차 고개를 넘어 민용호(閔龍鎬)와 합세하려 하므로 수성장(守城將)이 가서 달래어 제천진(堤川陣)에 합하게 하려 하였지만, 듣지 않고 벌써 영을 넘어갔다’고 하였다. 공이 탄식하며 말하기를, “이것이 바로 유유상종이라 하는 것이다.” 고 하였다. 정선군에서 포군들의 옷, 푸른 적삼과 화약·탄환을 바치고, 또 남진(南陣)의 황(黃) 소모 장(召募將)이 마음대로 불법을 자행하는 상황을 보고하였다. 전사한 사람 우규하(禹圭夏)의 아들이 운상하며 돌아가므로 상복을 지어 주게 하였는데, 유석원(劉石原)이 바느질삯을 내라고 조르기를 너무 심하게 하였다. 공은 노하여 말하기를, “이웃 마을에서 상사가 있어도 방아 찧고 상복 짓는 일을 도와주거늘, 하물며 이제 대의 를 위하여 죽는 이 마당에서 사소한 이익을 취하려 하니, 이것은 오랑캐의 풍속 중에도 심 한 것이 아니겠는가.” 하고 곤장을 때려 저자에 조리 돌리고, 여러 날 가두었다가 지경 밖으로 내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