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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2 듣고 와서 인사했다. 진동장(鎭東將) 이필희(李弼熙)가 글을 보내어 이르기를, ‘정이천(程伊川 : 옛날 중국 송나라의 학자)의 방화수유(訪花隨柳)하던 취미로서 전쟁에 얼마나 시달리십니까. 창을 밀치고 고요히 앉으시며 때로는 마음이 화평해질 것입니다. 사 람을 응접하는 번뇌(煩惱)로 인하여 마음과 눈에 해가 되는 것이니, 거사가 끝나게 되면 나는 예전같이 하려는 것이요.’ 전군장 홍대석이 밤에 기병 두어 명을 데리고 본진으로 들어오니, 공이 매우 기뻐하며, 작은 술자리를 마련하여 위로하기를 “얼마나 많은 풍파를 겪었으며, 얼마나 많이 마음을 괴롭혔소. 또 추성손(秋聖孫)[치경의 아이 때 이름임]이 전사했단 말을 듣고 나는 통곡하였소.” 하자, 대석은 말하기를 “각 군의 군수 물자를 공이 어떻게 공급하십니까. 생각컨대 공의 노고하는 심정은 비할 데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부득이한 일이 아니면, 일찍이 군수품을 달라고 한 일이 없었습니다.” 하며, 이어 서창(西倉)의 적의 형세를 말하고, 이튿날 아침에는 정운경(鄭雲 慶)을 천거하여 자기 소임을 대신 시켜 달라고 하며 말하기를, “나보다 나은 사람인데 맡겨서 무엇이 해롭겠습니까.” 하였는데 공이 허락하지 않았다. 대석은 굳이 청했으나 이루지 못하고, 새벽이 되자 떠났 다. 5일(양력 4월 17일;편자 주)에 팔송(八松) 파수군(把守軍)을 철수하고 우필규(禹弼圭)로 하여금 들어와서 본군(本軍)을 호위하게 하였다. 삼척 의병장이라 칭하는 김헌경(金憲卿)의 보고에, 지우석(池禹錫)·엄상렬(嚴相烈) 등이 군 사를 수합한다고 하며 가는 곳마다 말썽을 일으키는데, 대진(大陣)의 훈령이 아니요 사사 로이 하는 일 같으니 금하여 주기를 바란다고 하였다. 그 두 사람은 모두 호좌진(湖左陣) 의 사람으로, 영남진에 가서 소속된 사람이었다. 공은 헌경이 끝내 민용호(閔龍鎬)의 부리 는 바 될 것이라 하며 회답하지 않았다. ○ 대장소에서 추치경 등 의사총(義士塚)에 제사하였다. 우선봉 김운선(金雲仙)이 추치경·오문룡 등의 시체를 맞이하여 돌아오다가 신당(新塘)에서 적을 만나 도망하니 적이 시체를 칼로 난자하여 불태워서 형체를 분간할 수 없게 되었다. 이 날, 본진으로 운반하여 왔는데 두어 명의 시체만을 가려내어 본집으로 보내고, 나머지 일곱 시체는 한 무덤 속에 매장하고 그 자손들로 하여금 수호하고 제사 드리는 절차를 함 께 하게 하였다. 그리고 아래와 같이 글을 지어, “아! 사람이 세상에 나서 피하지 못하는 것은 의(義)다. 그러나 고금에 의를 위하여 싸워 죽은 일이 오늘처럼 성대한 적이 있었던가. 우리나라가 왜적에게는 벌써 임진년부터 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