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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1 갔다고 하였다. 서창(西倉) 방면의 적의 경보가 매우 급하여 부중(府中)이 경계를 엄히 하였다. 이때, 밤 은 캄캄하고 비는 내려붓는데, 적이 밤을 타서 쳐들어올 염려가 있어 정경이 처량하였다. 그런데 공은 손에 아언(雅言)을 펼쳐 들고 큰 소리로 낭독하며 사람에게 ‘죽을 사(死)’자를 가르친 설명에 이르러서는, 특별히 지적하며 말하기를, “의거(義擧)의 본의가 원래 이런 것이다.” 고 하였다. 내가 말하기를 “이것은 다만 원칙만을 말한 것이요, 적을 제압하는 데 있어서는 반드시 선생님께서 가르 치신, ‘일에 임하면 조심하고 모계(謀計)를 좋아하되 성사토록 한다.’는 말과 같이 한 후에 야 갖추어졌다 할 것입니다.” 고 하니, 공이 웃으며 “그것은 그렇다.” 고 하였다. 정수봉(鄭壽鳳)이 동창(東倉)에서 돌아와 진을 조령산성(鳥嶺山城)으로 옮겨 그 험한 곳으 로 근거를 삼고, 영 밑 7읍의 양곡 보급로를 통한 다음에 차츰 수안보 가흥(佳興)을 공격 할 계획을 하자고 청하였는데, 공은 허락하지 않았다. [나는 이때, 이 계책을 쓰지 않은 것 을 매우 애석히 여겼음.] 2일(양력 4월 14일;편자 주), 적이 다시 서창(西倉)으로 들어왔는데, 전군(前軍)이 험한 지 경을 의지하여 막았다. 이때 큰 비가 와서 총을 쏠 수가 없으니, 적이 이 기회를 탄 것이었다. 홍대석(洪大錫)이 군사를 이끌고 북창(北滄)으로 들어와서 [우리 군사는 모두 구식 소총을 사용하므로, 풍우 가 있으면 속수무책(束手無策)인데, 적은 산식 양총(洋銃)을 사용하니 10배나 빠를 뿐만 아니라, 풍우가 있어도 관계없었다. 의병이 패한 원인이 사실 여기에 있는 것이었음.] 군사 를 더 보내주기를 청하므로 이희두(李熙斗)를 보내어 8초(哨)의 병력을 거느리고 가서, 고 교(高橋)의 북창진(北滄津)을 튼튼히 지키게 하였다. 대장소의 명령에 의하여, 왜의 통역 이복이(李福伊)를 목 베었다. 광주산성 군사가 본진에 들렀는데, 여러 가지로 만류하였으나 끝내 듣지 않고 다른 사람 들과 순흥(順興) 서교(犀橋)에서 모이기로 하였으니 그 약속을 어길 수 없다고 하면서, 김 태원(金泰元)은 마침내 떠나 단양(丹陽)까지 가자, 또 이천(利川) 군사 약간 명이 와서 단 양에서 합세하여, 군사를 열지어 호령을 하면서, 수성장을 위협하고 돈·쌀·소·술 등을 바치 라고 하니, 경내가 소란하였지만 감히 나서서 언쟁하는 사람이 없었다. 2초(哨)의 병력을 보내어 유현(楡峴)을 파수하는 일을 돕게 하였다. 대장소에서 청풍(淸風) 고을 원 박종항(朴宗恒)을 청풍 수성장으로 삼으니, 종항이 명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