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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 이 모두 이런 유를 두고 이른 것이다. 그래서 공은 원수를 갚고 오랑캐를 물리쳐야 한다는 점을 들어 통절하게 말하여 회답하였는데, 그 변론이 매우 분명하고 절실하였다. 군량을 모아 바치는 일로 고을 안의 부유한 집안과 각처의 마름들을 불렀다. 이필희(李弼熙)에게 회답하는 글에 이르기를 ‘아우는 눈병이 더 심하고 화가 치밀어서, 항상 병에 죽고 의에 죽지 못할까 염려합니다. 그렇지만 오늘의 급선무는 군수품을 조달하는 일이요, 싸우고 지키는 일은 오히려 다음가 는 일입니다. 이런 사정을 깊이 알아주소서.’ 하였다. 이강년(李康䄵)이 얻은 화약 백 근을 본진에 바쳤다. 포군(砲軍) 유석길(劉錫吉)을 보내어, 원주(原州) 서면(西面)의 흩어져 있는 포수들을 수합 하여 데리고 와서 기다리게 하였다. 천총(千總) 박윤필(朴允弼)이 지평(砥平)에서 돌아왔다. 이에 앞서 공이 윤필을 보내어 백 선(伯善)의 여러 아들을 잡고, 의식(義植)을 뒤쫓게 하였는데, 이때에 돌아왔다. 3월 1일(양력 4월 13일;편자 주), 후군 종사 정당(鄭鐺)이 역(驛)의 도조를 받아들이는 일 로 평창(平昌)·정선(旌善) 고을에 갔다. 이민두(李敏斗)가 평창·정선 고을에 가서 흩어진 군사들을 수합하기를 청하였는데, 이병회 (李秉會)가 불가하다고 하여 말하기를, “지금 황기룡(黃基龍) 등이 걸핏하면 의병을 소집한다 칭하고 평창·정선 등 고을에 드나 들며, 이익을 취하고 재물을 거둠으로써 여러 고을이 괴로워한 지 오래였은즉, 반드시 모 집에 응할 사람이 없을 것이요.” 하였다. 지평수성장 안종엽(安鍾曄)이 사퇴하며 대신 임명하여 주기를 청하였는데, 대장소에 품의 하고 허락하지 않았다. 이때, 적병이 서울로부터 여주(驪州) 곡수방(曲水坊)에까지 도착하 니, 원근이 진동하고 여러 고을 수성장들은 의병편이라서 화를 입을까 두려워하여 거개가 사면하려 하고, 혹은 전혀 일을 보지 않는데, 지평읍이 더욱 심하였다. ○ 이강년(李康䄵)이 동창(東倉)으로 진군하였다. 강년이 성을 굳게 지키면서 유황·화약·탄환 등 물품을 보내고, 군량을 계속 도와 줄 것을 청하였다. 대장소에서 이희두(李熙斗)로 호위장(護衛將)을 삼았다. [희두는 부량자였는데 패전하자 의병을 팔아 벼슬을 얻었음] 이 날, 독송정(獨松亭)에서 진법(陣法)을 연습하였는데, 공은 이희두를 시켜서 조련(組鍊)하는 책임을 맡게 하고, 대략 나뉘었다 합쳤다 모였다 흩어졌 다 하는 법과, 징을 치면 물러나고 북을 치면 나아가는 절차와, 앉고 일어서고 나가고 물 러나고 달려가고 몰아치는 행동을 가르쳤는데, 군대의 모습이 엄숙하여 볼 만하였다. 참장(叅將) 한동직(韓東直)의 보고에, 적이 서울에서 곡수(曲水)에 왔다가 철수하여 돌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