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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8 숨은 뜻이었다. ○ 춘천 의병 김경달(金慶達)이 적을 꾸짖고 죽었다. 김경달은 포군(砲軍)인데, 원래부터 효도하고 우애하는 사람으로 고향에서 알려졌다. 무릇 아버지나 할아버지, 증조, 고조의 생신에는 반드시 철음식을 올리니, 고을에서 그의 지극 한 행실에 감복하여 김 효자로 불러왔다. 개화의 변이 일어나게 되자, 항상 분개하고 한탄 하다가, 의병 모집에 응하여 류중락(柳重洛)의 부하가 되었다. 가평(加平) 싸움에 장군 맹 영재(孟英在)가 출전하였다가, 전열(戰列)을 채 펴기도 전에 적의 탄환에 맞아 전사하니, 싸우는 군사들이 달아나 흩어졌는데, 경달은 굳게 서서 동하지 않고, 적 4, 5명을 총살하 고 적에게 잡혔다. 적이 달래기를 “네가 만일 우리를 따르면 죽음을 면하리라.” 고 하자, 경달은 크게 꾸짖으며 말하기를, “원래가 나라의 원수를 갚고 머리털을 보전하려 한 것인데, 불행히도 잡혔으니 죽는 것이 나의 본분이다. 어찌 뜻을 고칠까보냐.” 하고, 그대로 서서 탄환에 맞아 죽었다. 이 소식을 듣는 이들이 모두 장하게 여겼다. ○ 평창(平昌) 고울 의사(義士) 나시운(羅時雲)이 가흥(佳興)에서 패전하자 적을 꾸짖고 죽었다. 시운의 본관은 안정(安定)인데, 관동 지방 평창 고을에 살았다. 예전 임진왜란 때의 의사 수천(壽天)의 후손인데, 수천의 사실은 ≪응암지(鷹岩誌)≫에 자세히 적혀 있다. 시운은 원 래 호걸스럽고 상쾌하며, 강개하고 남에게 주기를 좋아하였다. 몸이 건강하고 담기(膽氣)가 있으며, 총을 잘 쏘므로 그에게서 총 쏘는 법을 배운 사람이 많았다. 그들이 노상 모여서 사냥하는데, 시운의 밭이 묵어가는 것을 보고서는, 반드시 힘써 김매어서 스승을 받드는 의사를 보였다. 공이 평창에 들어가서 도령장(都領將)으로 정하였는데, 공의 말이 매우 격 렬하므로 엄숙한 마음으로 귀를 기울여 들었다. 충주에 와서는 밤낮으로 같이 일을 보다가 병이 나서 집으로 돌아가니, 공은 허락하며 마음대로 머물러 있게 하였다. 병이 낫자, 집 안 사람과 친구들이 모두 힘써 못 가게 말렸지만, 시운은 개연(慨然)히 말하기를, “이미 죽기로 다른 사람과 약속하였는데, 병을 빙자하고 집에 있으면 어찌 의리라 하겠느 냐.” 고 하며 소매를 뿌리치고 떠났다. 가흥 싸움에 적의 소굴로 깊이 들어가서 적을 죽인 것이 매우 많았는데, 맨 나중에 적 2 놈이 크게 소리치며 앞으로 나오므로 시운이 포를 쏘아 죽였다. 그런데 몰래 밀밭에 몸을 감추고 있던 적이 시운을 쏘아 탄환이 왼쪽 어깨를 뚫었으나, 대개 앞을 향하여 진력하느 라 미처 뒤를 살피지 못했던 것이었다. 이때 우리 군사들은 다 물러나고 시운만이 홀로 남 아 잡히자, 적은 결박하고 칼로 살을 오리므로, 시운은 크게 꾸짖으며 말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