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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5 날의 주처(周處)와 같았다. 이때, 죽산 의병장 박곽산(朴郭山)이란 자가 속으로는 개화(開 化)를 두둔하며 딴 생각을 가지므로 치려 하니, 박곽산이 굉장하게 진을 치고 기다렸다. 손영국이 칼을 빼들고 돌격해 들어가며 그 군사들을 호령하니, 그 군사들이 감히 총을 쏘 지 못하고 앞으로 나오는 자도 없었다. 그래서 바로 앞으로 나아가 칼을 치려 하니, 박곽 산은 대응하다 칼이 부러져서, 마침내는 목을 베어가지고 돌아왔다. 충주 금관(金串)으로 와서 왜적과 접전하여 크게 깨뜨리고 탄금대(彈琴臺)에 주둔하였다. 이희두(李熙斗)가 갇혔 다는 말을 듣고, 의덕은 본진으로 달려와 변명하니, 공은 옷 한 벌을 주며 악수하기를 오 래 하였다. 노정섭(盧正燮)·유진하(俞鎭河)등이 힘써 정인설(鄭仁卨)의 재주가 크게 쓸 만하다고 천거 하며, “일이 성공하고 못 하는 것은 이 사람을 쓰고 안 쓰는 데 달렸다.” 고까지 말하니, 대장소에서 종사(從事)로 임명하여 며칠을 머물게 하였다가 내포(內浦)로 가서 군사를 모집하게 하였다. 우군장(右軍將) 안성해(安成海)가 윤영훈(尹永勳)으로 우군의 중군을 삼을 것을 청하니, 공은 대장소에 품의하고 허락하였다. 이날 우군이 갑자기 적을 만나서 미처 싸우기도 전에 군사들이 절반이나 퇴각하였는데, 영훈이 당장에 군사를 수합하여 80여 명을 데리고 오니, 안성해는 그를 쓸모 있는 사람이라고 여겼다. 그래서 이 청이 있었던 것이다. ○ 서한을 보내어 유격장(遊擊將)을 타일렀다. 그 글에 대략 이르기를 ‘영남(嶺南)에 대해서는 별로 신통할 것 없으니 일찍 동창(東倉)으로 돌아와 굳게 지키며, 적을 기다리는 것만 같지 못하다.’ 고 하였다. 이때 유격군이 문경(聞慶) 평치(坪峙)에 주둔하고, 날마다 전군(前軍)이 와서 구 원해 주기만 고대하였으니, 전군은 적에게 몰려 서창(西倉)으로 돌아와 주둔하였기 때문에 나가 구원하지 못하였다. 선비[이때 사객소(司客所)가 있었는데 선비들이 많이 거처하였음] 안홍원(安鴻遠)을 유격 소(遊擊所)에 보내어 유격장에게 ‘군사를 거느리고 돌아와서 동창(東倉)에 주둔하게 하라’ 고 하였다. [이때, 출전하는 여러 장수 중에 오직 신지수(申芝秀), 이강년(李康䄵) 두 장수 가 제일 우량하다고 하여, 많이 의지하고 우러러 보았음.] ○ 임진일(27일, 양력 1896년 4월 9일;편자 주), 서소모장(徐召募將)이 상주(尙州)의 적을 치다 불리하여 물러나 예천(醴泉) 에 머물렀다가 또 풍기(豊基)로 들어갔다. 경암(敬庵)(소모장 서상렬)이 일곱 고을의 장병들과 함께 말을 잡아 입에 피를 바르고 맹 서한 다음, 상주 태봉(胎峰)에 적을 치다가 불리하여 예천으로 나와 멈추었다가, 또 풍기 명봉사(鳴鳳寺)로 들어가서 서신을 보내어 말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