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4page

214 “너희들이 국모(國母)의 신체가 왜병의 불에 타고, 임금의 머리털이 왜놈의 칼에 깎인 것 을 생각한다면 결코 그놈들과 함께 한 하늘 아래 살 수 없음을 알 것이며, 집안 사정이나 제 몸에 관한 것은 자연 돌아볼 겨를이 없을 것이다. 대저 그런 후라야 원수인 적을 쳐서 멸망시키고 이름을 후세에 전할 것이니 어찌 좋은 일이 아니겠느냐. 또 군사를 쓰는 자가 제왕(帝王)이 되기를 바라고, 성을 쳐 땅을 빼앗는 것으로 공을 삼는다면, 이것은 이익을 다투는 군사다. 때문에 성공한 후에는 장수된 자만이 공명을 얻고, 허다한 군사들은 반드 시 기록되는 것이 아니거니와, 지금 너희들은 의병이니 의가 있는 곳에는 군사나 장수가 다 일반인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당시의 귀대 받는 것과 후세의 전하는 것이 높고 낮은 직위의 차이가 없는 것이니, 살아난다면 진실로 기쁜 일이요, 죽어도 그 근본을 잃지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먼저 의에 죽는 이는 오늘의 장원(壯元)이요, 세상에 아직 남아 있는 이 는 앞으로의 소망인 것이다. 너희들은 나의 이 마음을 알아서 한결같이 죽음으로 지키라.” 하니, 군사들이 모두 감격하고 분발하며 다투어 대답하였다. 종사(從事) 이기진(李起振)이 이향구(李馨九)를 천거하여 유현(楡峴) 파수장(把守將)을 삼 았다. 기진은 소년으로 종군하여 자못 활달하고 용맹과 지략이 있으며, 군중에서도 이따금 밤에 병서(兵書)를 읽고, 혹은 잠심(潛心)하며 연구하기도 하였다. 일찍이 충주성에 있을 때, 적의 포위가 급하여 탄환이 비 오듯 하였는데, 기진은 칼을 빼어 들고 말을 달려 흩어 지는 포수들을 독려하여 제자리를 지키게 하였다. 그 후에 집에 돌아갔다 또다시 성의 포 위가 매우 급하다는 말을 듣고 본진으로 달려오면서, 적이 교동(校洞) 뒷산에 벌려 앉아 향교에 불을 지르려는 것을 보고, 분심이 솟구쳐서 나가 싸우려 했으나, 손에 무기가 없어 마침내 가만히 산골짜기로 내려가 후군의 포수 10여 명이 파수하고 있는 것을 보고, 가만 히 나가서 공격하게 하였는데, 군사들이 모두 무서워서 움츠리고 감히 나가지 못하므로, 분히 여겨 그만 성중으로 들어 가서 하는 말이, “내가 그때 죽지 않는 것은 손에 무기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고 하였다. [후에 의병이 패하여 낭천(狼川)에 이르자 서경암(徐敬庵 : 상렬)이 전사했다는 말을 듣고, 기진을 시켜 시체를 거두어 오게 하였는데, 기진은 들어가지 못하였음.] 류홍석(柳弘錫)이 이날 춘천 가는 길을 떠났다. ○ 윤의덕(尹義德)이 음성(陰城)에서 적의 주둔지를 뚫고 수십 일 만에 본진으로 돌아왔 다. 처음, 공이 충주에 있을 때에 의덕을 청주(淸州) 등지로 보내어 군사를 일으키게 하고, 또 그 곳의 형편을 탐지하게 하였는데, 청주의 관속은 모두가 개화 계통이며, 또 군사들을 잘 훈련하여 의병을 격파하는 것으로 공을 얻으려고 하니 대개 강적의 하나였다. 의덕이 군사를 죽산(竹山)·안성(安城) 등지에서 수합하여 가지고 충주 사람 손영국(孫永國)을 데려 다 선봉을 삼았다. 손은 고향에 있을 때, 간음 겁탈하고 술을 즐기며, 촌락을 횡행하여 옛