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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2 “이미 산계(山溪)를 건넜다.” 고 하였다. ○ 기축일(24일, 양력 1896년 4월 6일;편자 주), 대장소의 명령으로 좌익(左翼) 우필규(禹 弼圭)를 보내어 군사를 거느리고 파랑령(波浪嶺)을 지키게 하였다. 후군장(後軍將) 신지수(申芝秀)의 보고에 “적이 많이 강녕(江寧)으로 들어왔다.” 하므로 뒤쫓아 들어올까 염려되어 필규를 보내어 임지로 달려가게 하였는데, 이때 밤은 캄 캄하고 빗발은 살대같이 굵었다. 얼마 있다가 윤명섭(尹鳴燮)의 우군으로부터 와서 보고하 기를 “우군의 소모장(召摹將)이 이미 왜병을 내창(內倉)에서 격파하여, 적은 벌써 가흥(佳興)으 로 물러나 달아났다.” 하니 곧 사람을 보내어 필규에게 마음 놓고 유숙하도록 하라고 하였다. ○ 신임 충주 참서(參署) 정기봉(鄭基鳳)을 타일렀다. 기봉이 와서 인사하고 의병 일으킨 일을 매우 좋게 말하면서 자진하여 따라 붙을 의사를 표시하는데, 말하는 태도가 진지하여 믿을 만하였다. 그러나 여러 사람들은 모두 그를 억 류하여 장래의 화단을 없애려고 하였는데, 공은 충신과 역적, 중화와 이적, 사람과 짐승의 구별을 들어 타이르고, 대장소의 명령으로 돌려보냈다. 단양 수성장이 가진 양곡 중에서 성 지키는 잡비를 떼어 줄 것을 청하자, 이병회(李秉會)가 말하기를 “성을 지키는 비용은 관(官)에서 지출해야 당연하며, 조금이라도 군량을 소모해서는 안 되고, 또 성을 지키는 데는 별로 많이 소비될 것이 없으니 허락할 수 없다.” 고 하였으나, 공은 대장소에 품의하고 허락하였다. 이때 좌군장 우기정(禹冀鼎)[의병이 패한 후에는 광주참령(光州參領)이 되었음]은 박달령 (朴達嶺)을 지키고, 우군장 안성해(安成海)는 족동(簇洞)을 지키고, 별장 원우규(元友珪)는 연호(鳶湖)를 방어하고, 참장(參將) 한동직(韓東直)은 단정(端亭)에 머물고, 신지수(申芝秀)· 이범직(李範稷)은 강녕(江寧)에 주둔하여 서로 성원(聲援)하니, 군중의 위세가 엄중하고 성 대하였다. ○ 적의 경보를 듣고, 조중봉(趙重峰)을 중심으로 한 7백 의사의 의리로서 좌중의 손에게 답하였다. 적이 다시 강을 건너 광동(廣東)으로 들어오니 이범직·안성해가 막았다. 이로 인해 중외 (中外)가 경계를 엄하게 하는데, 공은 태연히 말하기를 “만일에 대적하지 못하게 된다면 마땅히 7백 의사가 뒤를 따를 것이라.” 고 하면서 베개를 베고 잤는데, 그 코고는 소리가 평상시와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