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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 작고한 이춘영(春永) 장군의 조카 종덕(種德)이 자기 숙부 상사 때에 진중에서 보내 준 부조 물품이 소문과는 다르다 하여 글을 보내어 사실을 해명하니, 공은 글을 받고 매우 탄 식하였다. ○ 19일(양력 4월 1일;편자 주), 대장소에서 원우규(元友珪)로 별장을 삼아, 여러 장수들 과 함께 나가 단정(端亭)을 지키게 하였다. 의논하여, 각 역(驛)의 말 먹이는 집의 도조(賭租)를 조사해 내서 군용(軍用)에 공급하게 하였다. 이때 역(驛) 제도가 폐지되어 관청에서 도조를 관리하지 않는데, 역도(驛道) 백성 들은 그대로 내고 있으므로, 이런 의논이 나온 것이다. 그래서 먼저 평창 영월군부터 시행 하게 하였다. 참장(參將) 한동직(韓東直)의 보고에 ‘적이 지금 우리 군사의 동향을 정찰하려고 사내아이 2명을 보내어 제천(堤川)으로 들어왔다’고 하였다. 이때 군무(軍務)는 바쁘고 손님은 많으니, 공은 한 번 밥 먹을 때 열 번 씩이나 기동하여 결재하고 응수하며. 간혹 침식(寢食)을 제때에 하지 못하여 몸이 몹시 쇠약하여졌는데, 왜 놈들은 자주 나타나서 곳곳마다 계엄(戒嚴)을 해야 하고, 간악한 무리들은 사면에서 날뛰 어 각 지방이 소란하여 백성이 부지할 가망이 없었다. 공은 앉으나 일어나나 탄식하고 슬 퍼하여 눈병이 날로 더하니, 곁에서 보는 사람들이 민망히 여겼다. 아장(牙將) 서석화(徐石華) 등이 김백선(金伯善)의 시체를 호송하여 지평(砥平)으로 가서 도 민의식(閔義植)에게 아부하여, 즐거이 그 무리가 되고서 선언하기를 “공이 백선의 공이 많음으로써 시기하여 모함해서 크게 죽였으므로, 군사와 백성들의 인 심을 잃었으니 그를 따를 수가 없다.” 하며, 백선의 여러 아들들을 격노시켜 마침내 그 무리와 함께 배반하게 한 것이다. 우익장 (右翼將) 윤성호(尹聖鎬)를 보내어 민의식과 백선의 여러 아들을 잡게 하였다. ○ 이필희에게 글을 보냈다. ‘잘 있느냐’ 묻고, 또 ‘민의식을 쫓아 잡을 것’을 청하고, 또 역의 도조를 거두어서 군대 에 공급하게 하였다. 이때 의식이 지평 백선의 집에 숨어서 군사를 모집할 계획을 하고 있 었기 때문에 이런 부탁을 한 것이다. 22일(양력 4월 4일;편자 주), 죽산(竹山)·음성(陰城) 의병장 윤의덕(尹義德)·손영국(孫永國) 이 충주 서면에서 기별해 고하기를 “적에게 곤경을 당해서 늦게 오게 된다.”고 하였다.[손 (孫)은 충주 조원(棗院) 사람인데, 주색 잡기하는 천인 패류임.] 윤의덕(尹義德) 등이 충주 금관(金串)에 도착하여 왜적과 싸워 크게 깨뜨려 머리 14개를 베고, 탄금대(彈琴臺)에 주둔하였다. 기계감 민모(閔某)[이름은 모름]가 비용을 많이 허비하였으므로, 곤장 5대를 때리고 공이 수죄(數罪)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