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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8 바쳤다. 유격소의 유격장은 이강년(李康䄵)이었다. ○ 원도상(元道常)이 ‘송(宋)나라 육수부(陸秀夫)가 애산(崖山)바다 배 가운데서 대학을 강 론하였다’는 말을 적어 편지를 보내어 공을 권면하였다. 원(元)은 그때, 영춘(永春) 수성장으로 있었다. 공이 글을 보내고 매우 기뻐하면서 말하기 를, “제천(堤川)에 들어온 이래로 이런 말을 들어 권면하는 사람이 없었다.” 고 하면서 회답을 매우 진지하게 하였다. ○ 청하여 각 읍 수성장으로 하여금 전망(戰亡)한 사람들의 가족을 넉넉히 돌보아 주게 하였다. 서문평(西門坪)에서 점고(點考)하였다. 청풍(淸風) 수성장을 시켜 군량에 사용할 환곡(還穀)[관청에서 백성들에게 빌려 주었다가 받아들이는 양곡]을 실어 오게 하였다. 충주 하소동(荷沼洞) 소임의 보고에 “왜적 기병 30명이 가흥(佳興)에서 장호원(長湖院) 병참소로 나갔다.” 고 하였다. 16일(양력 3월 29일;편자 주) 죄인 나윤달(羅允達)이 밤을 틈타 도망갔으므로, 문지기의 직 책을 충실하게 하지 못한 죄를 들어 소문장 김인식(金仁植) 등을 곤장 때렸다. 영월(寧越) 사람 남일원(南一元)이 군수 물자를 강제로 징수한다 하여[이때 군중에서 사용 하는 돈과 양곡을 부유한 집에 책임 지워 바치게 하였음] 비난을 하며, 또 회피하기 위하 여 딴 곳으로 옮겨감이 있으므로 엄중히 처벌하려 하였는데, 남(南)이 도피하니 그 동리 소임 조동식(趙東植)과 그 친척 이동구(李東久)가 대신 잡혀 갇혔다. 17일(양력 3월 30일;편자 주)에 나윤달(羅允達)이 처형되었다. 윤달은 충주 용암(龍岩) 사 람인데, 전에도 동학당에 들어갔고, 또 의병을 빙자하고 남의 부녀자를 빼앗는 등 불법한 일을 마음대로 하므로 신지수(申芝秀)가 보고하여 처형하게 되었다. 모산(茅山) 포수 임억만(林億萬)이 민간을 소란시킨 죄로 참형(斬刑)을 당하게 되었는데, 대신 곤장을 맞고 죽음을 면하였다.[임(林)은 끝내 간악한 군졸이 되었으며, 의병이 서쪽으 로 나갈 때에 제 무리들을 데리고 달아났음.] 18일(양력 3월 31일;편자 주), 수성장 홍우범(洪祐範)이 면직되고, 전 군수 이병화(李炳 華)로 수성장을 삼았다. 공이 처음 원주에 들어갔을 때, 병화가 그 고을 원으로서 도망갔 으므로 공의 의심 을 받았는데, 충주에 있을 때 병화가 사정을 말하며 간청하기를 “옛날 도망간 이병화와 오늘 회개한 이병화는 전혀 다른 두 사람이니, 예전 병화로 하여 새 병화를 버리지 말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