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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4 “의병이 산성에 들어가 있은 지 한 달이 넘었는데, 북문 파수장(把守將)이 자기에게 중 한 책임을 맡기지 않는 것을 원망하여, 적과 통하여 계획한 사실이 드러나니, 주장 김태 원(金泰元)을 목 베어 죽이고서 미처 파수장을 임명하지 못하고, 그 자의 옛 보조관을 시 켜 그대로 지키게 하였더니, 그 자가 밤에 문을 열고 적을 맞아들여 그만 군사가 무너지 게 되었다. 그래서 남은 군사가 남궁영(南宮瑛)을 찾아 이수두(李水頭)로 나왔다.” 하는 것이었다. 이구현(李九鉉)·김동춘(金東春)이 거짓말을 하여 왜적을 벤 상을 받았으므로 군사를 보내 어 잡아들이게 하였다. 김교명(金敎明)이 영남(嶺南)에서 의병을 일으켰는데 군의 기세가 매우 높아간다고 하였다. 청풍(淸風) 수성장(守城將) 이건용(李建龍)이 와서 뵈었다. 건용은 청렴하고 근신하며, 성 을 지키는 데 있어서는 자기 집 재물을 갖다 쓰고, 공금은 한푼도 쓰지 않았다. ○ 의논하여 가족을 제천으로 옮기게 하였다. 공의 집 안이 지평(砥平)에 있으므로 백여 명의 권속이 해를 입을까 염려해서 가만히 친 근한 사람들과 의논하고 옮기게 하였다. ○ 서소모장(徐召募將)이 7읍(七邑) 군사들을 예천(醴泉)에 집합시켜 맹주(盟主)가 되자, 그 고을 원 유인향(柳仁馨)을 목 베었다. 이때 서공이 안동·예안·풍기·순흥·영천·봉화 등 여러 의병장을 거느리고 예천으로 들어가 서 본진(本陣)과 합하고, 고을 원을 목 베었는데, 원은 개화파에 붙어서 의병을 저해(沮 害)하던 자였다. 규구(葵丘) 14) 에서 모임을 가진 옛날 제환공(薺桓公)의 일을 모방하여 냇물 위에 모여 맹 서하였는데, ‘첫째는 역적의 편이 되지 말 것, 둘째는 중화의 제도를 변경하지 말 것, 셋 째는 죽고 사는 것으로써 마음을 변하지 말 것, 넷째는 자기 편의를 위하여 이렇다 저렇 다 하지 말 것, 다섯째는 적을 구경만하고 나가 치지 않아서는 안 될 것 등이니 함께 맹 서한 사람들은 맹서를 마친 후, ‘서로 친목 단합하여 춘추(春秋)의 대의를 밝히고, 사람과 짐승의 한계를 분별하여 나라를 맑히고 왕실(王室)을 튼튼히 해야 한다. 이 맹서를 변하 는 자가 있으면 신(神)과 사람이 함께 목 벨 것이다.’ 하였다. ○ 14일(양력 3월 27일;편자 주), 진사(進士) 이승설(李承卨)에게 답서를 보내었다. 그 글에 대략 말하기를 ‘지금 천하 만고의 망극한 큰 변을 당하였기로, 덕과 힘을 헤아리지 않고 경솔히 큰일을 시작하여 여러 번 기회를 놓치고, 병든 몸으로 군무를 보자니 정말 견디기 어렵구려. 불 14) 규구 : 중국 호남성 고성현에 있는 지명이다. 옛날 중국 춘추시대에 제(薺)나라 환공(桓公)이 여러 나라 의 임금들과 이 곳에 모여 맹서하고 약속을 정한 일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