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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 익을 탐내며 2년 동안 지평현감으로 있으면서도 적을 토벌할 의사가 없으므로, 백선은 의 리를 들어 크게 꾸짖고, 영재를 배반하고 공과 이춘영(李春永)에게로 와서 그 지도를 받으 니, 공이 도령장(都領將)으로 임명하였으며, 춘영이 또 선봉장으로 승격시켜서 그때부터 병 권(兵權)을 잡게 되었다. 그런데 사람됨이 거칠고 경솔하며, 글자를 모르고 술을 즐겨 하되 절제가 없어서 자주 군중의 계율(戒律)을 범하였다. 그러나 공이 군사를 일으킬 때에 공이 있었다 해서 특별히 용서하여 주었는데, 과연 태만하고 소홀하여 일을 그르쳤다. 공이 우연히 문서를 펼쳐 보다가, 작고한 이춘영(春永) 장군이 영(英)·미(美)·덕(德)·법(法) 네 나라 공사관에 보낸 글을 발견했다. 거기에 이르기를, 우리나라는 왜와 경계가 연접되 어 그들에게 받은 임진년의 2능묘(陵墓)의 재화(災禍)와, 갑신년 10월의 난리와 갑오년 6 월의 사변은 이미 신자(臣子)로서는 차마 말할 수 없는 일이었고, 이번엔 또 국모(國母)께 서 시해(弑害)를 당하였으며, 의복과 형체(形體)를 가지고 말하더라도 각국이 제각기 제 풍 속이 있는 것이 마치 만물이 각각 제 형태와 제 색깔이 있어 고칠 수 없는 것과 같은데 어찌하여 변경하려 드는 것이냐고 하였다. [글이 매우 많으나 여기서는 다만 두어 줄만 적 는다.] 공은 슬퍼하며, “이것은 입암(立庵)의 필적이다.” 고 하였다. 손님이 정세를 들어 공을 위하여 위태롭게 여기는 이가 있자, 공은 태연히 말하기를 “노고에 대해서 어버이를 즐겁게 한 것은 순(舜) 임금의 효도요, 군부(君父)에게 죄를 지 으면 도망할 길이 없다 하여 죽기를 기다린 것은 진(晋)나라 태자(太子) 신생(申生) 13) 의 공손이니, 우리들의 오늘날 심정도 이와 같은 것이다.” 고 하였다. [이런 등사가 곧 공의 장래 순절한 기상이며 또한 그 산같이 우뚝한 정대(正 大)한 곳을 볼 수 있다.] ○ 12일(양력 3월 25일;편자 주), 이명로(李明魯)를 끝까지 치죄하려 하다가 못 하였다. 명로가 간악하고 이끗을 탐내어 재물을 거두어들인다고 고하는 자가 있기 때문이었다. ○ 대장소에서 원서(院西)에 나가 여러 장수들을 위로하였다. 선생이 돌아와 갈리찬(葛里贊)에 이르므로, 공이 부하 군사를 거느리고 나가 영접하는데, 진용(陣容)이 정제하고 기치가 선명하니 구경하는 이들이 길을 메웠다. 13) 신생 : 중국 춘추 시대(春秋時代) 진(晋)나라 헌공(獻公)의 태자다. 헌공 소실 여희(麗姬)를 사랑하여 그 의 소생자 해제(奚薺)를 태자로 세우려 하면서 신생을 곡옥(曲沃) 땅으로 나가 거처하게 하고, 뒤따라 여 희의 참소가 계속되어 입장이 곤란하였지만, 신생은 아무런 변명도 원망도 하지 않고, 결국은 자살하고 말았다. 따라서 여기서는 안하사가 저 순 임금이나 신생이 주위 소인들의 참소가 어떻든, 또는 위에서 자 기의 하는 일에 대하여 이해가 있든 없든, 오직 자기들의 할 일들을 정성들여 하였던 것처럼, 자신도 다 만 신하와 백성된 직분으로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것뿐이라는 의미로 인용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