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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 하니, 공이 말하기를 “그렇지 않다. 소란한 때에는 후덕한 이가 아니면 진정시킬 수 없으며, 중망이 있는 이가 아니면 많은 사람을 깨우칠 수가 없으니, 일이 어찌 내가 그만 둘 수 있겠는가.” 하였다. ○ 11일(양력 3월 24일;편자 주), 전군장 홍대석(洪大錫)이 명호치(鳴湖峙)에 주둔하고, 자주 탄약·탄알·금전·포목류의 군수품을 청구하므로, 공이 청풍(淸風) 수성장(守城將) 이건 룡(李建龍)에게 명령하여 공급하게 하였다. 이원하(李元厦)가 엄문환(嚴文煥)을 잡아왔다. 문환이 머리를 깎고, 또 의병을 공격하려 하다가 민용호(閔龍鎬)가 평창(平昌)에 들어왔다 는 말을 듣고 도망하면서 말하기를 “조금이라도 나를 돕는 자가 있으면 저들을 섬멸하겠다.” 라고 하였다. 또 그의 아우는 머리를 깎고 일본으로 들어갔다고 한다. ○ 글을 보내어 여러 장수들에게 타일렀다. 그 글에 대략 이르기를 “아아, 하늘이 아직도 화를 내린 것을 뉘우치지 않아서 이러는가, 사람이 일을 못 해서 이러는가. 말을 하려 하나 할 말이 없고, 눈물을 흘리니 눈물이 한량이 없구나. 죽은 이는 충혼의백(忠魂毅魄)이 되었으니 아무런 한이 없겠지만, 산 이는 피곤한 군졸이 되어 겁만 많으니 이것을 어찌 하면 좋으냐. 비록 손빈(孫臏)이나 오기(吳起)·관중(管中)이나 제갈량 (諸葛亮) 등의 재주로도 손을 대기 어렵고, 계책을 베풀 만한 곳이 없다. 그러나 본시 성 패를 교계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라의 도리를 다할 따름이다. 그리고서야 하늘이 정한 시 기를 기다려야 하는 것이니, 지금부터는 더욱 더 정신을 가다듬고 마음을 크게 가지며, 상 과 벌을 신용 있게 하여 우리의 할 일을 다 해야 한다. 모두들 힘쓸지어다.” 라고 하였다. 여러 종사들이 가흥에서 돌아오자 확실한 보고를 받았는데, 처음 여러 장수들이 산을 의 지하여 주둔하고 있다가, 적이 강을 건너서 청룡촌(靑龍村)으로 들어가 불을 놓는 것을 보 고, 내려다보며 공격하여 적 두어 명을 죽이고서, 그대로 적을 추격하여 강을 건너 바로 적의 소굴로 들어가서 싸움이 급해지게 되었고, 또 백선(伯善)이 호응하지 않음으로써 깊 이 들어간 군사가 반격을 받았는데, 유독 좌군(左軍)만은 움직이지 않아서 군사를 온전히 하여 퇴각하였다는 것이었다. 김백선은 지평현(砥平懸)의 소민(小民)으로, 처음 맹영재(孟英在)의 군리(軍吏)가 되었다. 갑오년 동학 난리가 일어나자, 맹영재는 군사를 일으켜 토벌하면서 탐욕과 횡포로 백성을 해롭게 하여 크게 인심을 잃었고, 또 왜의 변란이 일어나게 되자, 맹(孟)이 개화에 붙어 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