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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 새로 들어온 군사를 고루 배정하고, 또 군사의 머리수가 제대로 다하지 못한 부대를 보충 하여 그 군 명단을 이병회(李秉會)에게 맡겼다. [공이 언제나 이르기를, 병회는 부서 군안 (簿書軍案)에 익숙하고, 각 고을 세무(稅務)와 아전들의 내용을 아는 데는 휘하(麾下)의 제 일인자라고 하였음.] 주천(酒泉) 방수장(防守將) 송문옥(宋文玉)에게 명령하여 속히 군인 가족들에게 양곡을 나 누어 주게 하였다. 화약 1백 근을 충주 여러 진에 보내었다. ○ 10일(양력 3월 23일;편자 주), 서소모장(徐召募將)의 서신이 안동(安東)에서 왔다. 군사 기밀의 일을 의논하였는데, 영읍(嶺邑)의 여러 장수들로 하여금 조령(鳥嶺)을 방어하 여 적의 통로를 끊자는 것이었다. ○ 원주의 한진기(韓鎭基)가 청원해 돌아갔다. 진기는 진국(鎭國)의 아우다. 진국이 죽자, 진기가 이구채(李球采)와 함께 흩어진 군사를 거두어 가지고 와 있었는데, 이때에 돌아가기를 청원하므로 서신을 주어 최군선(崔君善)에 게 보내어 더욱 흩어진 군사를 거두게 하였다. ○ 대장소에서 외당(畏堂)을 충주에 보냈다. 외당의 성명은 유홍석(柳弘錫)인데, 선생의 재종형으로서 호가 외당이다. 안팎으로 드나들 며 여러 가지 일을 보살폈는데, 이 날도 보내서 형편을 살피고, 또 군사를 위로하게 하였 다. ○ 을해일(10일, 양력 1896년 3월 23일;편자 주), 이강년(李康䄵)이 동창(東倉)에서 나가 수안보의 적을 공격하였다. 포군 우사윤(禹士允)을 주천(酒泉) 방수장(防守將)에게 보내어, 군량을 나누어주는 일 등 잡부를 보살피게 하였다. 좌군 우기정(禹冀鼎)이 화당(花塘)으로 물러나 주둔하고 가흥(佳興)사태가 불리하므로 공 문으로 보고하였고, 김백선(金佰善)의 보고도 역시 이와 같으므로, 듣는 이들이 실망하였 다. ○ 대장소에서 군사를 보내어 굴탄령(屈灘嶺)을 지키게 하였다. 들려오는 가흥(佳興) 사태가 단순하지 않으므로 적이 혹시 틈을 타서 들어오지 않을까 염 려하여서였다. 대장소에서 군사들을 위로하라 하므로 원서(院西)에까지 왔다. 종사 최병철(崔炳轍)이 말하기를, “어찌하여 여러 장수들로 대행하게 하지 않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