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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 을 수습하게 하였다. 한(韓)은 총 쓰는 방법이 매우 묘하였다. 충주성 싸움에 남산 위에 앉아서, 2명의 적이 단월평(丹月坪)에서 오는 것을 보고, 천보총(千步銃)으로 쏘아 적 1명을 넘어뜨렸는데 거리 가 10리였다. 영춘(永春) 사람 황기수(黃琦秀)는 자기 아우 인수(仁秀)가 왜와 통한 흔적이 있다고 하여 잡아 가두게 하고, 3일 기한으로 그 아우를 잡아 바쳐 사실을 다짐받게 하였는데, 얼마 있 다가 인수가 와서 대략 그것이 무함임을 변명하였다. 그러나 왜진에 왔다 갔다 한 지가 오 래여서 사람들의 말을 들을 만도 하였다. ○ 홍병진(洪炳晋)이 적을 정탐한다 빙자하고 이승휘(李承徽)와 함께 떠났다. 병진이 속으로 딴 마음을 품고 이런 기회를 탄 것인데, 공은 많은 노자를 주어 보냈다. 승휘는 일찍이 맹산(孟山) 고을 원을 지냈고, 충주 오갑(烏甲)에 살았는데 직재(直齋)선생 의 후손이다. 제천으로 와서 사량(司糧)이 되었다. ○ 종사(從事) 송회순(宋澮純)이 가흥(佳興)에서 돌아와 의병의 공격 이 불리한 사실을 보 고하였다. 이때 선봉 김백선(金伯善)은 군사를 장미산(薔薇山)에 주둔시키고, 취하여 인사를 모르는 데 후군(後軍)·우군(右軍)이 강을 건너 일제히 나가 적과 싸웠다. 적은 졸지에 당하는 일이 라 어찌할 바를 모르다가 백선의 군사가 산 위에 멀찍이 있으면서 나와서 적을 육박하지 않는 것을 보고, 군사를 나누어 산을 포위하고 치니, 우리 군사가 사면으로 적의 공격을 받을까 두려워하여 강을 건너 퇴각하였다. [백선이 일을 그르치는 것이 이와 같으며, 많은 장령(將令)을 범하여 끝내 틈이 벌어지게 되었다.] ○ 참장(參將) 한동직(韓東直)이 가흥에서 물러나, 논대(論垈)에 주둔하였다. 동직이 원주에서 군사를 일으켜 제천에 갈 양으로 원서(院西)에 이르렀는데, 마침 가흥 (佳興) 싸움이 일어나니 여러 장수들이 그가 온다는 말을 듣고 대장소에 청하여 끌어다가 함께 가흥으로 들어가려 하므로 공은 불가하다고 고집하며 말하기를 “먼 데서 온 군사를 면대하기도 전에 문득 전지(戰地)로 보내는 것은 어찌 정리상 있을 수 있겠는가.” 하고 말하였는데 여러 장수들이 굳이 청하여 가게 되었고, 싸움에 임할 때에는 사면에서 죄어 들어가며 서로 호응하여 신호하자고 약속하였다. 동직은 과연 백선(伯善)의 군사가 움직이지 않음으로써 역시 앞장서서 싸우기를 꺼리므로, 후군·중군이 혼자 싸우다가 물러 나게 되었다. 우군 포수 유한철(柳漢喆)이 왜의 통역과 수원 1명씩을 생포하여 들였는데 이튿날 총살하 였다. ○ 이강년, 홍대석이 수안보에서 퇴군(退軍)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