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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 청하였는데 장소에 품하고 허락하지 않았다. ○ 여러 장수들이 군사를 더 보내 주기를 청하였는데 대장소에 품의하고 허락하지 않았 다. 여러 장수들이 충주 매운(梅雲)에 이르러 군사가 적어서 머뭇거리며 더 보내 주기를 청하였는데 공은 허락하지 아니하며 말하기를 “조치가 이미 정해진 이상 일은 기틀을 잘 마련하는 데 있지 군사가 적은 것은 걱정할 바가 아니다. 더구나 내부를 비우고 많은 군사를 내 보내어 외부에 주력하는 것은 잘못된 계산이 아니겠느냐.” 고 하였다. 이보다 앞서 심상희(沈相禧) 등이 장호원(長湖院)의 왜적의 병참소를 공격하다가 이기지 못하고 군사를 거두어 원주로 들어가서 오래 있다가 남쪽 청풍(淸風)으로 나왔는데, 이때 우리 군사가 충주에 있어 형세가 매우 위급하니 심이 가서 구원한다고 하며 군사를 거느 리고 남쪽으로 나왔다. 그러나 여러 날을 머무르다가 우리 군사가 충주에서 청풍으로 들어 오는 것을 만나서 제천(堤川)에 주둔하고 있었다. 이 때 와서 좌군장 우기정(禹冀鼎)이 요 청하여 만나보고 구원하기를 청하여 함께 가흥(佳興)을 치자는 것이었는데, 심이 곁의 사 람들의 말을 잘못 듣고서 자못 좋지 못한 생각을 가지므로 허락하지 않았다. ○ 남궁영(南宮映) 등이 구원을 청하였는데 대장소에 품의하고 허락하지 않았다. 영이 춘천에서 퇴각하여 이수두(二水頭)에 주둔하고 구원을 청하였는데, 충주 방면의 전 역(戰役)이 한창 급하여 다른 것을 생각할 겨를이 없다고 회보하였다. 공은 여러 장수들이 서로 통솔을 못해서 모두 성기게 됨을 탄식하여 매양 제갈무후(諸葛 武侯)의 행진(行陣)이 화목하면 우열이 모두 제자리를 얻는다는 말을 들어서 개탄하며 외 쳤다. 공은 밤에 김사정(金思鼎)과 말하다가 군사를 일으킬 때의 노고를 말함에 이르러서는 “자네가 원주(原州)를 관할(管轄)하면서부터 헐뜯는 말이 매일 들어왔는데, 지금 와서야 그것이 모두 모함인 것을 알았으니, 대개 외부의 헐뜯고 칭찬하는 것으로 사람의 실지 행 동을 이렇다 저렇다 하여서는 안 될 것이 이와 같은 예라.” 고 하였다. ○ 전(前) 영월(寧越) 민병장(民兵將) 엄성하(嚴聖河)가 군령을 어긴 처벌을 받게 되었는 데, 대장소에서 용서해 주었다. 성하가 장령에 의하여 가흥(佳興) 근처로 가다가 마음이 약해서 바로 왔기로 참형(斬刑) 에 처하게 되었는데, 장소에서 성하가 일찍이 효자라는 이름이 있으므로 특별히 용서하게 하였다. 공은 안 된다고 하였는데 대장소에서 사람을 시켜 구원하게 하여 마침내 풀어 주 었다. ○ 원주(原州) 의장병 이인영(李麟榮)의 흩어진 군사 민응서(閔應瑞) 등 30명이 진중에 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