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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 하였다. ○ 소모장(召募將) 이범직(李範禝)이 승첩의 보고를 대장소에 올렸다. 범직이 천안부(天安府)에 들어가 그 고을의 원 김병숙(金炳叔)을 잡아내어 강제 삭발시킨 죄를 들어 목을 베고, 그 군기 문서를 압수하고 보고하였다. 또 군사를 보내어 장교(長郊) 의 윤미여(尹美如)를 잡는다고 소문을 퍼뜨렸는데, 미여는 명섭(鳴燮)의 아버지이다. 이때 명섭이 적진 중에 들어가 정탐하고 있기 때문에, 겉으로 그가 의병에게 죄를 지은 것같이 보여서 적들의 의심을 없이 하자는 것이었다. 며칠 있다가 명섭이 돌아왔다. ○ 기사일(4일, 양력 1896년 3월 17일;편자 주), 김석교는 사형을 감하여 곤장을 때리고, 이명로(李明魯)는 소모장을 면직시키며, 임백현(林百鉉)은 대장소의 명령으로 용서하였다. 석교는 간사하고 욕심이 많아서 백성을 괴롭히고, 명로는 그 부하가 좋지 못한 사람들이 며, 백현은 완강히 항거하며 복종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백현이 완강히 항거하므로 공이 군법을 시행하려 하였는데 대장소에서 용서하여 주게 하 였다.] 원주 소모총독(召募總督) 김사정 (金思鼎), 김사두(金思斗) 등이 군사를 거느리고 왔다. [사정은 연흥부원군(延興府院君)의 10대손인데, 자는 공매(公梅)요 연안인(延安人)이다. 사 람됨이 키가 작고 지략(智略)이 있어 범상하지 않았다. 공이 지평(砥平)에서 원주로 들어간 것은 곧 이 김사정의 권고를 따른 것임]. 처음 사정이 공의 지시를 받아 원주 지방 군사를 소모하다가 심상희(沈相禧)가 소란을 피워 거의 옹색한 지경에 달했는데 이 날 진중으로 들어온 것이다. 정수봉(鄭壽鳳)이 하루를 유한 후 작별하고 영남으로 돌아가니 공이 서운하게 여기며 말 하기를 “어찌하면 그대와 함께 지내며 서로 유익되게 하랴.” 하고 다시 “이 사람은 쓸모가 많다.” 고 하였다. 장재소(掌財所)에서 갑사갓끈을 대장소에 바쳤다고 하는 자가 있으므로 공은 이기진(李起 振)에게 말하기를 “우리들이 백성의 재물을 먹고 공금을 사용하는 것은 적을 토벌하는 일에만 그치는 것이 다. 만일 조금이라도 자기 몸을 사치하는 일이 있다면 신이 반드시 벌을 내릴 것이다. 1전 이나 만금(萬金)이나 벌을 받는데 있어서는 반드시 마찬가지일 것이니 두렵지 아니하냐.” 고 하였다. 원도상(元道常)이 그 아들을 시켜 병들어 소임을 감당하지 못하겠다고 하며 갈아 주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