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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 때문이다.” 라고 했다.[공 역시 식사 때마다 딴 상을 받지 않고 큰 그릇에서 같이 식사하며, 이속들이 강권하여도 듣지 않았다. 그리고 작은 밥그릇에다 두어 가지 찬을 갖추었는데 심히 박약하 였다. ○ 이곳저곳에 있는 쓰지 못할 기계를 내버렸다. 이에 앞서 어느 사람이 방패를 만들자고 자청하여 재물과 양곡을 많이 소비하며, 이곳저 곳에서 공장(工匠)들이 모여들었지만 끝내는 아무 소용이 없이 되고 말았다. 공은 탄식하 며 말하기를 “전쟁이 한창 급할 때 갑옷을 버리고 창을 끌고 도망가는 자가 전부인데 하물며 이 따위 것이랴.” 하였다. 친히 한 부대의 병력을 거느리고 부내 다섯 동리를 순찰하였다. ○ 무진일(3일, 양력 1896년 3월 16일;편자 주), 심이섭(沈理燮)이 가흥에 간다고 대장소 에 품의하니 허락하였다. 이섭 등[홍병진(洪炳晋)·이근영(李根永)]이 딴 생각이 있어 가흥에 가서 싸우는 것을 보겠 다고 핑계하고 서울로 올라가서 10분의 적신과 더불어 의논하여 의병을 공격할 계획을 하 려는 것이었다. 이섭은 판서 상훈(相薰)의 아들이며 문과(文科)하여 현재 주서(注書)였다. ○ 대장소에서 여러 장수들을 독려하여 가흥(佳興)으로 진군하게 하였다. 좌선봉 김백선(金伯善) 등을 보내어 후군 및 좌·우군을 데리고 나가서 가흥의 적을 치게 하였다. ○ 승장(僧將) 무총(武總)이 영남에서 돌아왔다. 먼저 번 공이 서강릉 방림(西江陵 芳林)에 있을 때에, 무총이 원주 구룡사(九龍寺)에 있 다가 원주의 급한 보고를 가지고 와서 뵈오므로 공은 의승장(義僧將)으로 임명하고, 승군 (僧軍)을 일으켜 협조하게 하였다. 이번에 영남에 갔는데 영 바깥 여러 고을에서 전혀 호 응이 없으므로 서상렬(徐相烈)이 두 번이나 가서 군사를 수모(收募)하였지만 끝내 뜻대로 되지 않았다. 무총이 예천(醴泉)에 갔다가 떠돌아다니는 도적이라는 무함을 입어 겨우 목숨만 보전하고 돌아왔다. 그러나 대구(大邱)의 중 성기(聖基)가 안동관찰사 김석중(金奭中)에게 붙어 못된 짓을 마음대로 하다가 무총에게 죽었다. 포병 한일룡(韓日龍)이 백성을 위협하여 빚을 받으므로 곤장 3대를 때렸다. 공이 병중에 군무를 보자니 그 노고가 이를 데 없지만 일찍이 술·고기 같은 것으로 조금 도 몸을 보양하는 일이 없었으니, 그의 모진 절개가 이러하였다. 군무가 격심하여 잠시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