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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 적다고 해서 인제(麟蹄) 등지로 가려고 하였는데, 종사 박상신(朴相臣)이 중지시켰다.] ○ 을축일(30일, 을축일은 1월 29일임. 30일은 오기로 보임,<참고>원문:乙丑 書諭各陣 三十日 節用愛民 及餉軍均一之意也 時 所在 執留饒戶糓 供軍, 양력 1896년 3월 13일;편 자 주) 글월을 보내어 각 진에 효유하였다. 글의 내용은 ‘물자를 절약하고 백성을 사랑하며, 군사들 대접을 균일하게 하라.’는 뜻이었 다. 이때, 가는 곳마다 넉넉한 집안의 곡식을 가져다 군사들에게 공급하였다. 종사(從事)를 보내어 병사(兵使) 임백현(林百鉉)의 집에 가서 군수품을 바치라고 독촉하였 다. 이명로(李明魯)에게 또 영서(嶺西) 소모사(召募使)의 책임을 맡겨서 이 날 떠났다. 왜적의 사통문(私通文)을 비밀히 가져다 보이는 자가 있었는데 그것은 ‘의병을 폭도(暴徒) 로 지목하고 곧 쳐들어간다.’고 하였다. 충주 내창(內倉) 윤참군(尹參軍)이 한 부대의 병력을 주면서 “가흥(佳興)을 치든가 혹은 후방을 차단하겠다.” 하였는데 허락하지 않았다. ○ 전군장(前軍將) 홍대석(洪大錫)이 청풍(淸風) 죽문동(竹門洞)에 주둔하였다. 대석은 민의식(閔義植)이 천거한 사람인데 처음에는 재주와 계략이 있는 것 같았지만 나 중에는 간사하다는 비난을 받았다. ○ 이 날, 공이 자기 부친 퇴앙공(退央公)을 모셔왔다.[퇴앙은 별호다.] ○ 병인일(2월 1일, 양력 1896년 3월 14일;편자 주), 영춘현(永春縣)에서 군수품과 화승 (火繩) 및 쇠고기를 바쳤다. 군수품과 소의 수효는 자세하지 않다. “청풍군의 이속 이덕문(李德文)이 적을 장회(長匯 ; 단양군) 싸움에 끌어들였다.” 하고 고하는 자가 있어 엄중 심문하였다. ○ 글을 보내어 영춘 고을의 원 신긍휴(申肯休)를 권유하였다. 긍휴가 병으로 직을 사퇴하니, 공은 권유하여 말하기를 “원수를 갚고 형체를 보존하는 일은 죽은 후에야 그만 둔다.” 고 하였다. ○ 글을 보내어 영춘 고을 수성장(守城將)을 권유하였다. 글에 대략 이르기를 ‘천지가 뒤바뀌고 사람이 변하여 짐승이 되니 어찌 통한(痛恨)스러운 일이 아니냐.’ 고 하였다.[이런 말투는 진정 공의 본색이다. 평소의 언어 문자가 마디마디 이와 같았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