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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 느냐.” 고 하였다.[이때 방패를 만들자는 말이 사방에서 일어났는데, 영남 사람 이상교(李相敎)가 송판으로 방패를 만들어 충주까지 가져왔으나 탄환이 종이 뚫듯 나갔다.] 군기감(軍器監) 우헌영(禹憲榮)이 휴가를 받아 집에 가므로 그를 영춘(永春) 원 신긍휴(申 肯休)에게 보내어 불러다 군에 대한 소임을 주었다.[신은 일을 보지 않았음]. 대장소에서 원도상(元道常)으로 수성장(守城將)을 삼았다.[역시 병을 칭탁하고 나오지 않 았음.] ○ 28일(양력 3월 12일;편자 주) 남루(南樓)에서 크게 사열하였다. 충주성에서 밤에 퇴각하면서 포군이 많이 흩어져 달아났으므로, 이 날 군사를 사열하며 다시 군안(軍案)을 만들고, 이병회(李秉會)로 하여금 그 일을 맡아보게 하였다. ○ 장소에 청하여 충주 덕산(德山)의 파수장(把守將)을 면직시켰다. 파수장 이구현(李九鉉)이 너무도 직책에 합당하지 않았다. 장소에 청하여 밀정 2명을 베었다. 성명은 기억되지 않는데 한치(閑峙)의 파수꾼이 2명을 잡아들였기로 공은 심문하여 실정 을 알았다. 그 놈들 말이 “왜적에게 돈 5백 냥씩 받고 가만히 들어와서 제천부(堤川府)에 불을 놓으려 하였다.”고 하였다. ○ 청하여 글을 영남 여러 고을 향교(鄕校)에 보내어 사과하고 이필익(李弼翼)을 목 베었 다. 단양(丹陽) 평동(坪洞)에 사는 원주인(原州人) 이필익은 원래 불량한 잡패로 향리에서 소문났는데, 요즈음에 와서 서경암(徐敬庵)[그때 영남(嶺南) 소모사(召募使)였음.]을 따라 먼저 영남으로 가서 마음대로 탐욕을 부리며 선비들을 업신여기니, 남쪽에서 들려오는 좋 지 못한 소식이 모두 필익에 관한 일이었다. 그래서 공은 글을 보내어 사과하였다.[사과하 는 글은 송석창(宋石愴)이 지었다. 그의 이름은 석(襫)이요, 횡성(橫城)에서 살았으며 원래 시문을 잘 짓기로 알려졌음]. ○ 문경(聞慶) 의병장 이강년(李康秊)이 본진(本陣)으로 들어왔다. 강년은 전주인(全州人)이며 효령(孝寧) 대군(大君)의 후손이요, 자는 낙인(樂寅)인데 무(武) 로써 출신한 사람이다. 사람됨이 다정다감하며 담기(膽氣)가 비범하고 전고(典故)를 널리 알았다. 머리 깎는 변고가 일어나자 자기 재물을 써서 민병(民兵) 수백 명을 모아 의병의 성세를 크게 떨쳤으며, 안동관찰사(安東觀察使) 김석중(金奭中)[울산(蔚産) 고을 하리(下吏) 로서 글을 잘하고 말도 잘했다. 죽게 되자 탄식하는 말이 “내가 인물이 천 냥, 말이 천 냥, 글이 천 냥인데 3천 냥이 죽는 셈이다.”고 하였으니 이 역시 상민(常民)의 말투임을 볼 수 있다.]과 우관(郵官) 김재담(金在淡), 순검 이호윤(李鎬允) 등을 베었다. 그러나 외로 운 군사라 혼자서 떨치지 못하고 적과 더불어 싸워 불리하게 되자 드디어 본진으로 들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