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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 한 것을 택하게 하였다.” 고 했다.[이것은 충주에 있을 때의 일이다.] 김병시(金炳始)는 안동인(安東人)으로 청음 (淸陰)선생 상헌(尙憲)의 후손이다. 정승으로서 충성되고 근실하니 조정에서나 민간들이 원래부터 대체를 아는 이라고 하였는데, 의병이 일어나자 적신들은 군사를 파견해서 의병들의 살을 씹고, 가죽을 깔고 자도 부족할 만큼 여겼다. 임금님께서도 그 원통함을 세세하게 아시지만 놈들을 꺼려서 감히 발설하지 못하 였는데, 이때 와서 의병으로 대우하도록 위에 권고한 것은 김병시의 힘이었다. ○ 신유일(25일, 양력 1896년 3월 9일;편자 주), 제천(堤川)으로 들어갔다. 병기(兵器)를 수선하고 무예를 훈련하며 시기를 보아 진격할 계획을 하였다. ○ 대장소의 명령으로, 가는 곳마다 군사들의 가족을 돌보아 주게 하였다. 포군들이 남의 전답을 빌려 소작하는 것을 혹시라도 다른 사람에게 옮겨 주는 일이 없게 하며, 그 마을에서 힘을 모아 그들의 생계를 돌보아 주게 하였다. ○ 민병(民兵)으로서 상처 입은 이들을 돌보아 주게 하였다. 본읍(제천) 구미(九眉)에 사는 유재원(劉在元)이 민병으로 충주에 갔다가 상처를 입고 돌 아와서 병이 들고 또 굶주린다고 급한 사정을 알림으로 수성장(守城將)[이민정(李敏政)인데 자는 사섭(士燮)이요, 호는 택옥(澤玉)이며, 택당선생(澤堂先生)의 후손이다.]에게 명하여 벼 1섬을 주게 하고, 서면(西面) 정기복(鄭己福)에게도 같이 주게 하였다. [그때 부상당한 포병·민병으로 구제받은 자가 매우 많았다.] ○ 청하여 주천(酒泉) 소모장(召募將) 이명로(李明魯)를 불러왔다. 이에 앞서 주천에 사는 진사(進士) 이명로가 소모장으로 임명되어 원주·횡성(橫城) 지방으 로 가서 군사를 모집하고 있었는데, 영을 내려 소환하였다. [명로는 전의인(全義人)인데 청 강 제신(淸江 濟臣)의 후손이다.] ○ 방패 만드는 일을 작파하였다. 충주 동창(東倉)에 건축하던 4대문[연전에 호남·영남 지방의 장정을 크게 징발하여, 각처 의 석재(石材) 및 황장목(黃腸木)을 운반하여 성을 쌓고 문루(門樓)를 짓다가 절반도 못하 고 작파하였음.]에 남겨둔 편철(扁鐵)을 가져다 방패를 만들자고 하는 이가 있으므로 명령 하여 실어 왔는데, 포를 쏘아 시험해 보니 탄환이 5,6겹을 뚫고 나갔다. 공이 말하기를 “감히 다시 방패를 만들자고 말하는 자가 있으면 처벌하리라. 옛날에는 활을 사용하였기 때문에 방패로 막았지만, 지금의 포탄은 막을 물건이 없다. 그러므로 저 양놈이나 왜놈 같 은 재주로도 방패를 가지고 막는다는 소문이 없는 것은 이런 이치가 없기 때문이다. 이번 에 송판(松板)과 철판을 가지고 온갖 방법으로 시험해 보았으나 아무런 소용이 없으니 백 성을 괴롭히고 재물을 낭비할 뿐이며 또 공임이 적지 않으니 어찌 잘못된 계획이 아니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