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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4 들은 올라오는 자마다 다 죽이니 적이 감히 가까이 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여기서부터는 밤낮으로 고전(苦戰)하여 잠시도 쉴 사이가 없었다. ○ 경술일(22일, 양력 3월 6일로 추정;편자 주)(*‘경술일(22일)은 만세력과 맞지 않음, 22 일은 무오일임.原文:庚戌夜 出東門 退次淸風府 二十二日 賊 四面環攻 外村無以供柴粮 遂 自將所 爲退守計 將啓北門 門鎻辟戾 不可動 遂出東門 取路新塘黃崗 翊日 入淸風府 追聞 其夜 賊兵大至北滄俟半夜襲北門 若然 則門之不闢 天也;편자 주) 밤에 동문으로 나와 퇴각하여 청풍부(淸風府)에 유진하였다. 적이 사면으로 둘러싸고 공격하여 외촌(外村)에서 시초(柴草)와 양곡을 공급할 길이 없으 므로, 마침내 대장소(大將所)에서 퇴각하여 지킬 계획을 세우게 되었다. 처음에 북문을 열 고 나가려 했으나 문의 자물쇠가 어긋 움직이지 않으므로 할 수 없이 동문으로 나와 신당 (新塘)·황강(黃崗)으로 빠져 이튿날 청풍부로 들어갔다. 추후에 들은즉 그 날 밤에 적병이 많이 북창(北滄)으로 와서 밤중이 되기를 기다려 북문으로 습격하여 들어갔다고 한다. 그 렇다면 북문이 열려지지 않은 것은 하늘이 도와서였던 것이다. 충주성 싸움이 매우 급할 때에 적이 향교를 불태웠는데, 공이 친히 가서 곡하며 절하고, 여러 위패를 실어다가 동각(東閣)에 간직하였다. 그런데 이때, 성 밖의 여러 촌락들이 불에 타서 그 참혹한 정상은 차마 눈뜨고 볼 수 없었다. 이날 밤 공이 후방을 막아 끊으며 맨 나중에 나오는데, 적이 사면으로 육박하여 불빛이 하늘에 환하였다. ○ 중군장 이경기(李敬器)가 군안책(軍案冊)을 잃어버렸다. 병졸들이 떠들면서 “군안책이 적의 손에 들어갔으니 반드시 성명과 주소를 조사하여 화를 입힐 것이다.” 라고 하였다. 또 중군의 종사 한 사람이 싸움을 독려한다고 하면서 함부로 칼을 뽑아들고 포군 한 사람을 쳤는데, 그 포군은 사실 힘써 싸우던 사람이라, 찍은 것이 죄가 있어서가 아니므로, 큰 상처가 난 것은 아니지만 군사들이 많이 원망하였다. ○ 경신일(24일, 양력 1896년 3월 8일;편자 주), 대장소에서 공을 중군으로 임명하였다. 이경기가 그 직책을 다하지 못하고, 또 간만이 빠져서 집으로 갔으므로 그 직위를 갈고 공을 중군으로 임명하였다. 이 때 여러 군사들이 와서 모여 전과 같이 되었다. 사람이 말하기를 “이범진(李範晋)·이윤용(李允用)·이완용(李完用) 등이 임금님을 받들어 아라사 공사관으로 파천(播遷)하고, 김홍집(金弘集)·어윤중(魚允中) 등 여러 적신(賊臣)의 목을 베고, 의병에게 충성 충(忠) 자의 군호를 목패(木牌)에 써서 하사하고, 삭발(削髮)을 금지하며, 의복은 편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