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2page

182 보에 왜의 병참(兵站)이 있어 여러 번 사람을 시켜 정탐했었다. 이 때 유주막에서 패배당 한 적병이 달아나 가흥으로 향하니 이공이 듣고, 만나 싸울 량으로 군사 수백 명을 거느리 고 달천(達川)에 이르렀는데 적은 벌써 강을 건넜다. 드디어 안반천(安盤川)까지 좇아갔으 나 만나지 못하고 밤에 회군하는데, 충주성으로 들어가지 않고 바로 수안보로 나갔다. 의 암(毅庵)은 혹시나 실수할까 염려하여 군령을 내어 불러들이니 홍대석(洪大錫)이 명을 받 고도 나가지 않았고, 이공은 곧장 안보에 이르러 사면으로 압축해 들어갔다.[이공 이하는 서암(恕庵)의 말임]. 이때 싸움이 한창 커지니 공치 손수 육혈포(六血砲)를 시험해 보았는 데 포가 옆으로 튀며 탄환이 나가지 않았다. 마침 홍선표(洪選杓)가 뒤에 있었는데 공은 육혈포를 주며 말하기를 “이것이 무슨 까닭인지 좀 보아 달라.” 하면서 몸을 잠깐 돌려 맞은편에 서 있던 나무 밖으로 나가는 순간 ‘팽’ 하며 어디선지 날 아오는 유탄에 얼굴을 맞았다. 홍선표·배동환(輩東煥) 등[모두 성재(省齋)의 문인(門人) 들 이다]이 부축하여 끼고 물러나자 여러 군사들은 기운이 꺾여 포위한 것을 풀고 물러났다. 길가의 남녀들이 눈물을 흘리며 말하기를 “이 분이 우리들의 머리털을 보전하게 하려다가 마침내 자기 목숨을 바쳤다.” 하였다. 성 남문에 달도하자 여러 장수들이 군법에 의하여 영구(靈柩)를 안치하고 죄를 대령하니, 장소에서 곧 문을 열고 위로하며 곡하였다. 공은 이공과 고향이 같고, 또 여러 대를 한 집 안처럼 지내던 터이라 소리 내어 울며 기절하였다가 다시 깨어났고, 성중의 인사들도 슬퍼 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이공은 사람됨이 소탈하고 원대한 지략(智略)이 있으며 군사를 다 스리되 은혜와 의가 겸비하여 부하들이 그의 밑에서는 사력을 다했다. 이때의 나이 28세 였다. 이튿날 영구를 지평 고을 본집으로 돌려보냈다. ○ 남산을 파수하였다. 장소에서 공에게 명하여 남산을 지킴으로써 남쪽에서 들어오는 적을 막게 하였다. ○ 장소에서 전 삼화부사(三和府使) 이경기(李敬器)로 중군을 삼았다. 경기는 곧 성 쌓는 역사를 감독하였다. ○ 선생에게 상소하기를 청하는 자가 있으므로 공은 간하여 중지하게 하였다. 공의 의론은 대략 다음과 같다. “만일 상소하였다가 간악한 적당들이 임금의 명령을 빌려서 ‘파병하여야 한다.’ 하면 어 찌할 것인가. 그러므로 오늘의 의리는 오직 적을 쳐서 옛것을 회복하는 것으로 주를 삼을 뿐이요, 일이 성공한 다음에는 마땅히 스스로 옥문 앞에 나아가 먼저 아뢰지 못한 죄를 청 하여야 한다.” 하였다.[어찌할 것이요, 의 이하는 서암(恕庵)의 말임.] 이때 적은 자주 외로운 성에 육박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