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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1 저물녘에 적이 도로 가흥으로 돌아갔다. 의병이 충주성에 들어가던 날 밤에 규식이 구원을 청했던 가흥의 왜적이 이제야 나타난 것이었다. 대개 적도 힘을 다하여 구원하러 온 것으로서 밤중에야 도착한 것이다. 만일 우 리 군사가 성 앞에 육박했을 때 그들이 먼저 와서 기다렸더라면 승패가 과연 어찌되었을 지 모르는 일이니 역시 신명이 도와 준 것이었다. 이때 급보가 들어오기를 ‘적이 남산으로 들어와서 사직당(社稷堂) 송림 속에 매복하였다.’고 하였는데 이튿날 이른 아침에 적이 남 산에서 내려다보며 공격하여 포환이 비 쏟아지듯 하므로 우리 군사가 성을 의지하고 격전 을 전개, 적을 매우 많이 죽이니 적이 물러나 가흥으로 달아났다. 적병이 머물고 있던 곳 에는 핏자국이 젖어 있었다. ○ 계묘일(7일, 양력 1896년 2월 20일;편자 주), 장소(將所)에서 파수하는 여러 장수들을 보내어 유주막(有酒幕)·금관(金串)·탄금대(彈琴臺)·단월(丹月) 등 아홉 곳의 좁은 목을 지켰 다. 홍대석(洪大錫)·정익(鄭瀷)·황주목(黃疇穆) 등을 보내어 좁은 목을 나누어 지켰다. 이때 적병이 떼를 지어 내왕하며 갖가지로 날뛰었다. 그러나 우리 군사들이 가는 곳마다 승전하 여 죽이고 생포한 것이 매우 많아 이루 다 헤일 수 없었다. ○ 민의식(閔義植)의 죄상을 들어 장소에 아뢰고 베이려 하다가 이루지 못하였다. 도사(都事) 민의식이 대장의 종사가 되어 행동이 방자하니 사람들이 많이 원망하지만 감 히 말을 못하였다. 공이 그 사실을 자세히 들어 장소에 품의하고 베이려 하였는데 의식이 마침 일이 있어 멀리 가서 죽음을 면하였다. ○ 군관 임경준(林景俊)이 죄가 있어 베이게 되었는데 많은 사람들이 힘써 구원하여 장소 의 명령으로 풀어 주었다. 임경준을 보내어 판서(判書) 정해륜(鄭海崙)의 집에 가서 군수품을 독촉해서 받아들이게 했는데, 그 집에서 경준의 무례함을 호소해 왔다. 그래서 공은 경준을 베이려 하는데 여러 사람들이 힘써 구원하여 면하게 되었으니 장소의 명령이었다. ○ 파수장 홍대석(洪大錫)이 적을 유주막에서 격파하였다. 날이 밝자 적이 수회리(水回里)로부터 강을 따라 내려오는데 대석이 잠복해 있다가 들이 치니 적이 퇴각하여 달아났다. ○ 정미일(11일, 양력 1896년 2월 24일;편자 주), 중군장 이춘영(李春永)이 안보(安堡 : 수안보)의 적을 토벌하다가 순절(殉節)하였다. 이공은 웅장하고 날래고 대담하였다. 이공은 일찍이 생각하기를 ‘조령(鳥嶺)은 호서(湖西)· 영남의 요지이니 차지하고 있으면 나아가 일을 할 수 있을 것이다’ 했는데 조령 아래 수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