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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9 “네가 원래 선비란 이름이 있었는데 어찌도 그리 왜놈 되는데 용감하냐.” 고 하니, 상기는 황망하여 어찌 할 줄을 모르며 애걸하고, 숙은 버젓하고 태연하게 버티었 다. ○ 경자일(4일, 양력1896년 2월 17일;편자 주), 제천읍을 떠나 원서(院西)에서 잤다. 이때 먼저 평창 고을 민병(民兵)을 징발시키고, 계속하여 제천 군사들을 징발하여, 평창군 에 사는 이원하(李元厦)로 장수를 삼고 제천 군사에는 승지 우기정(承旨 禹冀鼎)으로 장수 를 삼았는데, 합하면 수천 명이 되었다. 이것이 비록 쓸모는 없지만 병세(兵勢)를 과장하여 적들의 이목(耳目)을 놀라게 하자는 계책이었다. ○ 신축일(5일, 양력1896년 2월 18일;편자 주), 얼음을 타고 북창(北倉)을 건너 충주부(忠 州府)를 쳐서 이기고 성안으로 들어갔다. 이때 군의 기세가 매우 성하더니 구경하는 사람들이 퍽이나 많았다. 먼저 종사(從事) 수 십 명을 보내어 길을 나누어 나가는데 수리(數里)씩 사이를 두어 길손같이 하고 만일 급한 일이 있으면 차례로 전하여 달려와 보고하기로 하였다. 이때 김규식(金奎軾)이 충주관찰사 로서 왜의 직제(職制)인 순점·순포를 많이 두되, 반드시 패악한 무리를 구해 충당시키며 머 리 깎고, 왜복(倭服)을 입고, 왜 칼을 차고, 신과 모자까지도 왜것을 사용하게 하였다. 그 리고 그들을 사방으로 보내어 강제로 삭발하니 부내(府內) 사람으로서 아직 다른 곳으로 옮겨가지 못한 사람은 날마다 도망하여 면하려 하여도 되지 못하고, 먼 지방 사람도 만나 기만 하면 반드시 머리를 깎이고 마니 인심이 소란하였다. 의병의 깃발이 남쪽으로 쳐들어 온다는 말을 듣고는 강제로 삭발을 당한 사람들이, 자기가 하고 싶어 한 일은 아니지만, 옥과 돌이 함께 불타게 될까 두려워하여, 고향을 떠나는 사람의 행렬이 길을 메웠다. 군사 가 북창에 당도하니, 이때 날씨가 따스하여 얼음이 매우 엷으며, 또 배가 없으니 나룻 사 람들이 위태롭게 여겼는데, 무사히 건너 마음을 놓았다. 성에 당도하니 왜장(倭將) 2명이 북루(北樓)에서 포를 쏘고, 지키는 군사는 또한 많았으나, 대세가 눌리는 바라 스스로 대적 하지 못할 것을 알고 도망하여 흩어졌으며, 우리 군사들은 둘러싸고 공격하였다. 이때, 흰 무지개가 두어 겹으로 하늘을 둘렀다. 공이 말하기를 “이것은 승전할 징조라.” 하여 적을 급히 쳤다. 규식이 이보다 앞서 가흥(佳興)에 있는 왜적에게 도와주기를 청하였는데, 여주(驪州) 의병 장 심상희(沈相禧)가 그때 이천(利川)·여주의 왜적을 치니 가흥의 왜적이 가서 구원하고 규 식을 구원하는 자가 없으며, 규식의 징발한 외촌(外村) 포군(砲軍)은 모두가 억지로 징발되 어 온 터이라 의병을 칠 생각이 없었다. 대군이 성을 공격하며 총소리가 요란하여 삼등[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