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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7 일로 여러 선비들의 앞을 섰다. 마침 어머님 상사를 당하였는데, 변란이 장차 일어날 것을 생각하고 형편에 의하여 열흘 만에 장사를 지냈다. 변이 일어나자 장담에 있는 여러 선비 들이 모두 말하기를 “오늘에 있어 의리에 적당한 처사가 세 가지 있으니, 첫째는 군사를 일으키는 일이요. 둘 째는 해외로 가는 일이요, 셋째는 숨어 살며 제 몸을 깨끗이 갖는 일이다. 각기 요량해서 행할 따름이다.” 고 하였다. 이에 선생은 진작 해외로 나갈 계획을 하고 문하생 최열(崔烈) 등 몇 명과 함 께 곧장 제(齊)나 노(魯, 중국의 산동성 지방)로 들어가려 하였다. 그것은 한 가닥의 중화 명맥을 요순문무(堯舜文武)의 옛 땅에서 보존하고, 혹시 선생과 마음이 맞는 이가 그 곳에 서 일어나게 되어 그 다소에 따라 중화의 법을 써서 야만을 문명으로 변하게 한다면 천하 후세에 말이 없지 않을 것이며, 또 송우암(宋尤庵, 송시열;편자 주) 이후로 중국의 대륙이 물속에 잠긴 채 3백 년을 지났으나, 궁국에 달하면 다시 통하는 이치를 바랄 수 있다고 생각한 때문이었다. 그래서 원주 석남촌(石南村)에 당도하자 공이 창의(倡義)하였다는 말을 듣고 매우 기뻐하였는데, 이윽고 의거가 어려운 점이 많다는 말을 듣고 와 보게 된 것이 다. 주천(酒泉)에서 방림으로 들어가 공을 보고 모든 계책을 다 일러 주며 격려하니 공이 매우 기뻐하였고, 또 평일에 숭배하기를 성재 다음으로 했던 처지였다. 이때에 와서 여러 장수들이 모두 지위와 명망이 서로 비슷하여 명령을 받을 곳이 없으므로, 여러 사람들이 울며 선생께 간청하였다. 선생은 혼자 생각하기를 선왕의 제정한 상례(喪禮)를 지키려 해 도 지킬 길이 없을 뿐더러 노공(魯公)의 목적을 무고한 것은 이미 성인(聖人)도 허락했던 일이요, 또 중원에 가는 길은 너무도 까마득하며 눈앞의 큰 일이 실패될까 매우 염려되었 다. 그래서 개연히 대의(大義)에 몸을 맡겨[제공(諸公) 이하 여기까지는 서암의 말임.], 드 디어 상복을 평복으로 바꾸어 입고, 장소(將所)에서 일을 보며 각자의 재능에 따라 여러 장수에게 책임을 나누어 맡겼는데 공으로 전군장(前軍將)을 삼고, 이춘영(李春永)으로 중군 장을 삼고, 신지수(申芝秀)[자는 영삼(靈三)인데 상촌(象村)의 후손이요, 동양위(東陽尉)의 8대손이다. 소년 시절부터 총명하고, 재주와 계략이 있으며 강개한 지사(志士)였다. 의병을 일으킬 때, 이미 공로가 있었으며 장수가 되어서는 가장 명장이었으니, 여러 진영이 의지 하여 중하게 여겼음.]로 후군장을 삼고, 원규상(元奎常)으로 좌군장을 삼고, 안성해(安成海) 로 우군장을 삼으며 참모 종사(從事) 약간 명을 임명하였다. 드디어 문루(門樓)에서 여러 장수의 이름을 불러 차례차례로 군례를 받고 군사를 사열하니, 강산도 숙연(肅然)하여 모 습이 달라지고 인심이 안정되어 진중이 튼튼하게 굳혔다. ○ 이 날 밤에 장령(將令)을 내려 전군(前軍) 종사 선달(先達) 신이백(辛二白)을 베었다. 이백은 지곡(芝谷)에서부터 영월까지 따라오며 보는 일에 근간하였다. 그러나 마음이 음 험(陰險)하고 성질이 조급하여 일마다 소란을 피웠다. 공이 평창 도둔촌(桃屯村)으로 나왔